중세 사람들의 거실에는 이런 그림이 하나쯤 걸려 있었을 것이다. 정숙한 부인이 밤을 새워 수놓은 화려한 자수. 주제는 틀림없이 그 시대의 미덕인 화목과 굳건한 신앙이었을 테다.
이제는 실크 스크린에 디지털 자수를 놓는 시대가 되었지만, 켄트 헨릭슨의 작품은 영락없이 중세 수공예품 스타일을 지향한다. 모든 중세적 요소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방해하는 등장인물 ‘복면 사나이’만 빼고 말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복면 사내들은 나머지 등장인물들을 겁탈하고 죽이며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과격한 주제에도 작품이 너무 예뻐 일단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헨릭슨의 의도라고 한다. 폭력과 공포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때, 우리는 얼마나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존재인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수에 새겨진 폭력의 증거는 이처럼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이번 전시는 켄트 헨릭슨의 첫 국내 개인전으로, 헨릭슨의 신작 15점과 조각 5점을 공개한다.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벽지가 설치됐으니, 액자만 보지 말고 벽도 둘러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