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랑받는 두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와 온다 리쿠가 2009 서울국제도서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연애소설, 미스터리, 성장소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독특한 분위기와 매혹적인 문체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두 작가가 말하는 소설 이야기.
<유지니아> <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온다 리쿠를 처음 알고 꽤 바빴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겨우 다 읽었다 싶으면 이미 새로운 책이 나왔고 그렇게 출간된 책들은 항상 나의 독서량을 앞질렀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샘솟는 느낌. 그녀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1992년 <여섯 번째 사요코>로 등단해 지금까지 쓴 소설이 45편. 현재 연재 중인 작품도 8편이다. 미스터리, 추리, SF, 성장담. 장르도 소재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 발간된 소설 <어제의 세계>엔 이 모든 게 담겨 있다. 온다 리쿠 이야기의 원동력은 뭘까. 그녀의 후기작들을 차례로 읽고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서로 다른 장르, 다양한 소재에 발을 걸친 그녀의 작품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온 게 아닐까 하고. 이편이 아닌 저편, 표면엔 드러나지 않는 수수께끼. 이는 장르의 틀보다 온다 리쿠의 소설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다. 그리고 이를 궁금해하는 건 이야기꾼의 본령이다. 장르의 틈새로 풍겨나오는 오묘하고 불안한 분위기. 온다 리쿠의 인장과도 같은 이 기운을 되새기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의 세계>를 구상한 시작점이 궁금하다. =공동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떤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직접적인 계기는 영국의 TV드라마 <프리즈너>다. 옛날에 방영된 꽤 컬트적인 드라마인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로 끌려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항상 소설을 쓸 때 제목을 먼저 정하고 책의 표지를 구상한다고 들었다. =처음에 제목을 정한다. 그러면 영화 포스터 같은 게 떠오른다. 제목이 적혀 있고 소설의 어떤 장면이 그려져 있는. 그 느낌으로 표지를 부탁한다. <어제의 세계>는 신문 연재를 할 때 쓰였던 사진을 보고 그 카메라맨에게 부탁한 거다.
-연재로 진행한 작품이면 도중에 바뀐 이야기나 설정이 있나.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쓴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계속 어떻게 끝낼지 망설였다. 쓰면서 결말이나 이야기를 생각한 적은 많지만 이번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산을 오르다 ‘아, 나왔다’라는 순간이 정말 마지막이었던 느낌이다.
-주인공 남자는 눈으로 본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 하지만 스스로는 남들에게 거의 기억되지 않는 캐릭터다. 어떻게 떠올린 설정인가. =지금은 전에 없는 정보화사회다. 지식이 검색하는 대상이 됐고 세계가 도서관처럼 돼버렸다. 인간에게 정보란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모든 걸 기억하는 능력, 하지만 동시에 그걸 억제하려는 인물이 떠올랐다.
-실제 모델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모델이었고 당시 어떤 느낌을 받았나. =처음에 그런 능력이 있다고 들은 건 중학교 사회선생님에게서다. 그런데 이 책을 출판한 다음 “나도 그런 능력이 있어요”, “나도 옛날엔 그런 게 가능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꽤 만났다. 의외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싶더라.
-이번 작품 역시 다(多)시점이다. 챕터별로 화자가 바뀐다. 당신에게 시점이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나는 1인칭의, ‘나는’이라고 시작하는 소설을 잘 못 쓴다. 한 사람만 본 세계를 쓴다는 건 왠지 답답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의 시점 혹은 제3자의 시점에서 쓰는 게 더 편하다. 영화 <라쇼몽> 이후 일본에선 라쇼몽-시추에이션이란 말이 생겼다. 같은 사건도 다른 사람이 보면 전혀 다른 걸로 기록된다는 거다. 어차피 일이나 사건이란 모두 주관적으로 느끼는 거니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흥미가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이 인상적이다. 실제 모델이 있나. =없다. 픽션이다. 지금까지는 오래된 마을을 보고 그곳을 무대로 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여러 곳들을 모아 하나의 장소로 만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수로가 있는 옛날 마을이 좋다. 또 이번 작품은 구조하치만(기후현에 위치한 소(小)교토라 불리는 도시. 물의 마을이라고도 한다)이란 장소의 이미지를 많이 참조했다.
-여행을 하면서 작품에 대한 모티브를 얻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여행을 하면 확실히 영감을 얻는 게 많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 차에서 바라본 경치에서 느껴지는 게 있다. 모티브랄지, 쓰고 싶은 테마랄지, 장면이 잘 떠오르는 편이다.
-최근에 갔던 여행지는 어딘가. =지난해 가을에 모로코에 갔다. 페즈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은 미로처럼 되어 있다. 차도 들어가지 못해 걸어다녔는데 정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헤매게 된다. 현지 사람들은 길을 안다고 하는데 그 풍경이 매우 재밌었다.
-그럼 모로코가 배경이 된 작품이 곧 나오는 건가. =아마도. 모로코를 무대로 소설을 쓸 예정이다.
-<어제의 세계>는 음악처럼 진행되는 기분도 들었다. 연재를 했던 작품이기도 한데, 각 챕터와 전체적인 균형은 어떻게 조절했나. =일단 1장씩 생각해서 써내려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템포가 붙지 않았다. 연재 중이어서 템포가 뜨는 경우도 있었다. 내 소설 중에서는 이야기가 천천히 흘러가는 편인 것 같다.
-당신 작품 속 인물들은 항상 고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고독은 일정 정도 인간관계의 어떤 거리, 간극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가령 피가 연결되지 않은 형제랄지, 먼 친척이랄지. 당신이 흥미를 갖는 인간관계가 어떤 건지 궁금하다. =나는 ‘기울기’의 인간관계에 흥미가 있다. 본인에겐 어쩔 수 없는, 어쩌지도 못하는 이유가 있어 조금의 거리가 생기는 관계에 끌린다.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그리는 게 내가 소설에서 흥미를 갖고 하는 일이다.
-<어제의 세계>를 읽고 가장 크게 느낀 건 망각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기억, 과거는 항상 당신 작품에서 중요한 테마다. =기억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기억이 없으면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그리고 토지에도 기억이 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느낀 건데 사람의 기억과 토지의 기억은 교감하는 부분이 많은 거 같다. 기억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을 한다, 오래된 것을 없앤다고 하면 토지도 기억을 잃는다.
-이번 소설도 그렇지만 <유지니아>부터 결말이 애매모호해지거나 전체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강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당신의 세계를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최근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장르라는 틀 안에 당신의 세계가 들어가고 그 속에서 장르의 요소들이 재배치되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믹스-장르, 안티-미스터리 등의 말들도 나온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물어보면 당신에게 장르란 무엇인가. =아, 기쁘다. 사실 일본에서 장르는 마켓적인 면에서 사용됐다. 이 책을 어느 카테고리에 둘 것인가의 문제.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믹스 장르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정보의 양 자체가 늘어났고 영상작품과의 관련도 많아지고. 내 세대, 그리고 나보다 젊은 세대는 굳이 장르를 나눠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의 세계랄지, 누구누구의 월드랄지. 1인 1장르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최근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한 걸 봤다. =롤플레잉 게임 같은 걸 하면 스토리가 소비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하나의 스테이지를 끝내면서 이야기가 전부 소비되고 만다. 모두가 그냥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에 이야기를 잘 끝내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떻게 해도 독자는 만족하지 않을 것 같고. 메타픽션이란 말도 평범하게 쓰인다. 이런 시대라면 또 어떤 엔딩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엔 오픈엔딩을 많이 쓴다. 이후 이야기는 독자에게 맡겨서, 그 사람이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끝내게 하고 싶다.
-이야기를 끝내는 게 어렵다는 거, 당신의 작품이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장르를 믹스매치하고 있다는 건 일면 당신의 이야기가 가진 다른 세계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설이외>에는 “표면에 보이는 것이 세계는 아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가 있다. 지금의 세계를 의심해본다”라는 의미의 구절도 나오는데. =그렇다. 특히 21세기가 되면서 세계가 더 개인적, 상대적으로 된 느낌을 받는다. 사실이란 건 존재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이 조합되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경향이 최근 내 소설에 나타나는 것 같고. 그리고 지금은 2지선택형의 세계가 됐다. 이것도 이상하다. 사람의 성격, 생각의 방식이 그렇게 간단히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래서 점점 더 그레이존(gray zone), 애매한 부분에 흥미를 갖는 것 같다. 그레이존을 좀더 인정하자, 확실하지 않은 세계에 독자를 데려가고 싶다.
-현재 연재 중인 작품이 8편 정도 된다고 들었다. 이야기가 서로 헷갈리거나 하지는 않나. =나는 좀 바보 같아서(웃음) 동시에 서로 다른 종류의 소설 쓰는 게 더 편안하다. 그게 나랑 잘 맞는 방식 같다. 가능하면 서로 먼 세계의 이야기를 쓰려 하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섞이진 않는다. 혼란스럽지도 않다. 다만 매번 전회로 돌아가 다시 읽고 고치는 게 귀찮달까. 현재 쓰는 작품들도 다 제각각이다. <장미없는 뱀>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주인공 미즈노 리세가 나오는 시리즈로 영국이 무대고, <블랙 벨벳>은 <MAZE> <클레오파트라의 꿈>에 나오는 토르코가 무대인 서스펜스물이다. <어리석은 장미>는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소년 소녀와 흡혈귀 전설이 연결되는 SF판타지고, <회색환시행>은 객선을 무대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환상 미스터리다.
-항상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은데 책, 영화 등에서 아이디어를 받은 경우가 꽤 되더라. 역시 많이 읽으니까 많이 쓰는 건가. =그렇다. 읽지 않으면 못 쓴다. 나는 지금도 계속 독자로 있고 싶다. 소설을 쓸 때도 독자로서 쓰는 느낌이 든다. 작가라기보다는 독자의 연장에서 쓰고 있다. 어차피 오리지널 스토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가지 패턴의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연출해 재밌게 전달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