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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피플] 엄마로 산다는 것
장영엽 2009-05-28

<여행>(2008)

영화 <마더>를 본 뒤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잔상이 있다. 김혜자 선생님이 연기하는 엄마 혜자의 가녀린 체구다. 혜자는 약재 자르는 작두에 손이 베어(스포일러 아니다) 피가 뚝뚝 떨어져도 아들 걱정이 우선이다. 그 억센 아줌마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 있다. 바로 카메라가 그녀의 몸을 아주 가까이, 혹은 아주 멀찍이서 바라볼 때다. 클로즈업된 혜자의 손은 거칠지만 섬세하고 가늘다. 아들 옆에 누워 쪽잠을 자는 그녀의 실루엣은 아기처럼 천진난만해 보인다. 그런 장면은 나이 많은 어른도 사실 작고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녀를 ‘엄마’라 이름붙이고 책임을 지우는 건 숙명 같은 핏줄과 고립된 주변 환경인 것을.

<마더> 얘기를 오래 한 건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말하고 싶어서다. 지난해 출간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더>의 엄마와 비슷한 점을 느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능수능란하게 풀어내던, 토지문화관에 입주한 후배 문인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던 노작가는 거기 없었다.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 어머니에게 ‘구멍지기’라 꾸중듣던 여자아이(<여행>)와 짧지만 아름다웠던 청춘을 알아보지 못한 후회로 마음이 어지러운 여자(<산다는 것>)가 있을 뿐이다. 선생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얘기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상처받기 쉬운 자아도, 모성으로서의 책임도 살아 있는 한 떨쳐버릴 수 없다. <마더>의 혜자가 그렇듯 말이다.

박경리 선생의 추모 1주기를 맞아 유고시집의 삽화를 맡은 김덕용 화가의 전시가 5월24일까지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열렸다. 선생의 유품과 시집에 실린 삽화가 함께 전시된 자리였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 너머로 발화되지 못한 내면의 이야기가 언뜻언뜻 비친다. 박경리 작가의 시와 원래 한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의 그림이 궁금한 사람은 시집을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