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서로 어울리지 않을 “길티”와 “플레저”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꼭지의 원고 청탁 전화를 받고 나자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가 <씨네21> 기사에서 꼭지 제목을 못 보고 지나친다는 것과 내게도 “길티”한 “플레저”가 있다는 것. 전자는 몇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돼서 깨달았고, 후자는 내가 쓸 원고의 마감이 언제인지 묻는 순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마감 무시하는 걸 즐긴다는 것을. -_-;;;;
모든 것에는 각자의 마감이 있게 마련이다. 더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거나(원고를 안 넘기는 경우), 수명이 다 되거나(휴대폰 배터리가 다 방전될 때까지 안 쳐다보기), 썩어 문드러지거나(장바구니 안의 채소),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거나(농담이 지나쳐 얼굴이 몹시 붉어지는 경우) 하게 되는 것은 모두 마감의 선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 마감의 선을 넘는 순간부터, 즉 뭔가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져버린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짜릿해진다. 물론 죄책감과 상실감에 머리를 쥐어뜯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즐거움은 어릴 때 겪은 한 사건에서부터 시작했다. 길을 가다 갓 죽은 참새 한 마리의 시체를 발견해서 줍고, 집까지 들고 들어와 아무도 안 보는 재봉틀 서랍에 넣어두고 깜빡 잊은 것. 사나흘이 지나서야 그 참새의 작은 몸뚱이가 스스로의 마감을 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소리와 냄새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기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앞마당 작은 배추밭 사이에 버렸고, 배추를 모두 거둘 때까지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마감의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언제나 궁금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살면서 그런 충격적인 마감을 기다리는 것은 그 뒤로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언제였던가, 냉장고에서 꽁치가 들었던 갈색의 물범벅 비닐주머니를 코를 쥐고 꺼내던 것을 빼고는. 대신에 나는 부엌 한구석에 채소, 특히 당근 놓아두는 것을 즐겨했다.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고 실제로도 잘 지키고 있지만, 왠지 당근만 보면 그러지를 못해 언제나 한두개 더 사서 방치하곤 했던 것이다. 하루이틀 지나면서 방치된 당근은 검은 점이 군데군데 생기다가 흐물흐물 쭈글쭈글해지고(이때까진 버리거나 먹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유심히 쳐다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나중엔 더이상 당근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체가 까맣게 변하면서 그 크기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때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는 건 당근이다.
이상이다. 쓰다보니 불행히도^^ 이 글의 마감은 지키게 되었다. 지키고 나니 “언길티”한 “플레저”도 있다는 것 또한 알겠다.
정성원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잡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출판사 편집장이다. <페이퍼하우스>의 편집장이기도 한데 책상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