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이 여자들의 불조절 감각만 앗아간 건 아니다. 우리 마누라는 뜸들인다는 뜻을 모른다. 누룽지를 부엌에서 퇴출시켰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을 푸고, 갈색의 누룽지가 솥에서 일어날 때의 광경을 여러분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입안에 누룽지를 적당히 구겨서 밀어넣으면 치아 사이에서 바삭 하고 터지는 감촉 뒤에 고소한 누룽지 냄새가 가득 찬다. 오도독 씹고난 누룽지는 어금니 위에 오랫동안 남아 그 맛을 남겨주었다. 영화 <식객>은 그 맛의 추억을 우리에게 불러다 대령시킨다.
<식객>에는 치명적인 맛의 복어, 아름다운 쇠고기, 화려한 궁중요리가 등장하지만 정작 입맛을 다시게 하는 주인공들은 따로 있었다. 앞서의 누룽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우정출연하는 반찬들이다. 복어요리를 잘못해서 요리계에서 물러나 은둔하던 김강우는 자기 집을 찾은 요리방송 프로듀서 이하나 일행에게 밥을 대접한다. 그는 오래 묻어둔 오이장아찌를 무치고, 간장에 절여둔 깻잎을 꺼낸다. 묵은 된장으로 바글바글 찌개를 끓이고,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밥을 푸고, 누룽지를 고소하게 일으킨다.
영화는 시종 김강우와 임원희의 대결로 이어진다. 김강우는 최고의 숯을 굽지만, 임원희에게 빼앗긴다- 숯가마 장면에서 슬쩍 보여주는 3초 삼겹살 굽는 모습은 군침 도는 보너스다. 결국 뒤지던 점수를 쇠고기 정형에서 만회하는데, 이 설정은 좀 난센스다. 요즘 어떤 요리사가 소를 잡아 각을 뜬단 말인가.
영화의 대미는 육개장으로 맵고 진하게 마무리된다. 임원희는 맛있는 육개장을 끓였지만, 김강우에게 지고 만다. 대령숙수 칼을 걸고 대회를 연 일본인은 그 이유를 “조선의 정기가 없이 유부와 간장으로 맛을 낸 일본식 육개장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내 소견으로는 좀 이상하다. 유부는 모르겠으나, 간장은 전통 육개장 맛의 핵심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 익은 조선간장 맛은 육개장에서 쇠고기보다 더 중요한 재료가 되곤 한다.
국산 요리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영화는 빅스타도 쓰지 않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어떤 요리연구가나 요리사, 학자도 이룩해낼 수 없었던 허영만 화백의 독보적인 콘텐츠의 승리라는 평도 있었다. 실제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힘은 발군의 에피소드- 숯쟁이 사형수 한씨나 우중거의 라면 스토리 같은- 에서 비롯됐다. 연출력도 신선했다. 자칫 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요리영화를 속도감있게 밀어붙인 게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만화처럼 칸을 나눈 다단 편집은 새로웠다. 어쨌든 관객은 침을 흘리고 있었고, 스스로 스크린을 찾은 ‘식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