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그림의 제목 <도망자>는 가출한 꼬마를 가리킨다. 빨간 손수건에 주섬주섬 싼 허술한 보퉁이가 홧김에 꾸린 여장임이 한눈에도 분명하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해 배가 고파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섰으리라. 동네 순경과 주방장은 어린 도망자의 행색에 모든 걸 눈치챈 듯 사연을 묻는다. <도망자>가 ‘가출’의 삽화라면 <집을 떠나며>는 ‘출가’의 이미지다. 농사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은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목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반대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이미 넋을 빼앗겼지만,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의 손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모닝 포스트>의 표지로 쓰인 두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는 노먼 록웰(1894~1978)이다. 록웰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너무도 달콤해 몸에 독이 될 것 같은 애플파이의 향이 난다. 동심원이나 삼각자를 겹쳐놓아도 한치 오차가 없을 법한 완벽한 구도 속에 안착한 록웰의 세계는, 귀향 군인을 반기는 이웃, 졸업 무도회의 연인, 칠면조 접시를 든 어머니, 소녀가 데려온 인형을 진찰하는 의사 등 평범하고 선량한 미국인들로 북적인다. 록웰은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그러했듯 미국- 이라는 이상- 을 ‘발명’했다. 센티멘털한 일러스트레이터 록웰은 살아생전 평단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록웰의 이상향은 어디까지나 “현실로부터” 상상 가능한 장소였다. 흑인 민권운동과 관련된 참혹한 사태를 접한 말년의 그는 “47년간 나는 존재 가능한 세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왔다. 이제는 할아버지와 강아지만 그릴 수 없는 때가 왔다”며 <우리 모두의 문제> 같은 작품을 남겼다. 흑인 소녀가 토마토가 투척된 자국이 남은 벽 앞을 걸어 등교하는 광경을 소녀의 키 높이 시점으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록웰이 평생 그린 4천여점의 주제는 ‘아메리칸 드림’이었으나 그 꿈들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소상했다. 오직 보이는 것만 믿었던 록웰은 허클베리 핀 이야기의 삽화를 그리기 위해 마크 트웨인의 고향에서 모델의 옷을 구했고, 자서전 한 페이지에는 살아 있는 닭의 포즈를 잡는 요령을 상술해놓기도 했다.
하나씩 포착된 화면 모든 모델과 소품은 반드시 주제의 구현에 복무한다. 록웰의 성심어린 기교는, 화면 안팎의 미국인을 포옹하는 방식이었다. 생전에 아티스트라 불리지 못하고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록웰이 자신을 규정한 다른 직함은 스토리텔러다. 록웰의 그림은 찰나를 담지만 우리는 직전과 직후의 사태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도망자>의 다정한 삼각구도와 두 어른의 자애롭고도 짓궂은 미소는 소년의 안전한 귀가를 예고한다. <집을 떠나며>의 아버지는 기적이 울리면 슬픔을 떨치고 화면 왼쪽의 붉은 깃발을 흔들어 아들이 탈 기차를 세울 것이다. 과연 록웰은 탁월한 연출자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록웰의 자화상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
*각주: 그중에서도 록웰을 향한 매우 세련된 독설을 남긴 이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로서, 그가 몹시 싫어하는 화가 달리를 가리켜 “어려서 집시에게 유괴당한 노먼 록웰”이라고 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