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좋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건 아니기에 주당이랄 순 없지만, 소주도 와인도 정종도 아닌 맥주를 향한 애정만큼은 자신있다. 한데 단서가 붙는다. 효모를 키워 만들어 마실 정성도 없고, 원료와 생산지에 열광하는 마니아도 역사를 꿰는 전문가도 아니다. 대형마트건 편의점이건 허름한 슈퍼건 어디서나 파는 평범한 맥주로 범위를 한정하자. 기왕이면 캔맥주가 좋다. 한캔 한캔 비운 뒤 찌그러트리는 재미는 기쁨을 넘는 뿌듯함이다.
맥주는 어울림의 술이다. 저녁식사에 반주로 곁들여도 좋고, 기름진 음식, 단출한 스낵과도 궁합이 좋다. 지친 하루의 끝에 들이켜는 시원함은 어떤가. 얼린 잔에 담겨 저절로 살얼음이 언 드래프트 한 모금이면 머리끝까지 시원하고, 신촌 구석 지하를 2층으로 나눈 호프집에서 절묘한 냉기로 얼려낸 ‘얼음거품 병맥’은 케첩과 함께 내주는 싸구려 오징어 튀김과 마리아주하면 금상첨화다. 다혜리 선배와 말로는 이미 마실 만큼 마신 ‘야구장 종이컵 생맥’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어느 해 여름, 홍대 근처의 특색없는 바의 파티오에서 연방 주문했던 1500원짜리 잔맥주 릴레이는, 다음날 가라앉을 줄 모르던 얼굴의 홍조를 잊게 할 만큼 청량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떤 이는 배가 불러 싫다고 하는데, 까짓 거 화장실 한번이면 꺼질 배다.
자칭 맥주애호가로서 가장 기쁠 때는 레이블이며 그 맛이 무궁무진한 외국을 여행할 때다. 일본, 독일, 네덜란드 모두 좋았으나 1년가량 머물며 골고루 맛보고 취해본 캐나다 맥주의 맛은 향수로 남았다. 꿀 내음이 묻어나던 허니라거, 빙하의 원대한 냉기가 담긴 듯한 필스너, 월요일이건 금요일이건 들이켰던 캐네디언 등을 벗삼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캐나다는 주류 판매점에서만 술을 팔기에 한번 행차하면 24캔들이 상자로 사왔는데, 유학생의 없는 살림에 박스 2개를 엎어 밥상 삼았던 빈곤함도 추억이 됐다.
잡설이 길었다. 4월 첫주, 건조주의보와 함께 맛보기로 다녀간 믿지 못할 더위가 예고한 것처럼, 올여름은 폭염이란다. 그래도 살얼음 살짝 언 맥주와 함께라면 30도를 웃돌 찜통더위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엄살은 접어두자고. 미리부터 찡그리진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