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에 아이돌 그룹이 뜬다고 한다. 최근 한국 대중음악 동향에 대한 분석들을 봐도 그렇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경기가 유례없이 뜨거웠던 때에도 대중음악의 중심에는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가 저금리, 저환율, 저유가의 ‘3저 호황’을 누리던 무렵 가요계 최고의 스타는 ‘소방차’였다. 같은 시기, 버블 호황으로 넘쳐나는 현금 유동성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웃나라 일본의 대중음악계 역시 일곱명의 소년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탄 채로 휘젓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히카루 겐지(光GENJI)였다.
히카루 겐지는 두명의 ‘히카루’와 다섯명의 ‘겐지’로 이루어진 자니즈 아이돌 그룹이다. 오늘날 슈퍼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한 스맙(SMAP)도 이들의 백댄서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87년 데뷔와 동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히카루 겐지는 버블 호황이 정점을 찍은 1988년에 오리콘 연간 싱글차트 1~3위를 자신들의 곡으로 채우며 기염을 토했다. <파라다이스 은하>는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 대망의 1위곡. ‘시끌벅적하게 즐겨보자고, 파라다이스’라고 외치는 이 노래는, 어떻게 돈을 버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고민거리였던 당시 일본 청춘들의 송가였다. 그 무렵 히카루 겐지의 팬클럽 회원만 50만명에 달했다고 하며, 그들 특유의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는 일본 열도에 롤러스케이트 붐을 불러일으켰다.
희한하게도 히카루 겐지의 인기는 버블 경제와 운명을 함께했다. 1994년 해산 라이브의 암표가 무려 100만엔에 거래되기도 했다지만 1990년대 이후 그들의 인기는 하락세로 접어든 상태였다. 히카루 겐지와 운명을 함께한 것은 단지 경제지표만이 아니어서 많은 이들이 쇼와시대의 끝을 장식한 아이돌로 그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일본의 미디어에서는 1989년을 마지막으로 ‘가요’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J-Pop’이라는 신조어를 쓰기 시작했다. 히카루 겐지는 가히 현대 일본 정치·경제·문화의 격변기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아이돌인 셈이다.
그러니까 경제 불황기의 아이돌 붐은 좋은 아이돌 그룹들이 활동했던 호황기의 판타지를 곱씹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에서는 모닝구 무스메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이 ‘잃어버린 10년’ 시절 큰 인기를 구가하여 그같은 가설을 증명한 바 있지 않은가. 지금 한국에서도 그러한 판타지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돌아온 손담비를 통해 더욱 노골화되어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