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유혹>이 뚫고 <꽃보다 남자>가 지나간 막장드라마의 터널에 이제 출구가 보이는 걸까. 제목만 듣고 뻔한 아줌마 드라마인 줄 알았던 <내조의 여왕>이 유쾌한 웃음과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시청률은 방송 때마다 경신되고, 최철호와 윤상현 등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을 받는 중이다. <내조의 여왕>의 종영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최근 4부를 연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이 웃고 울며 사는 모습들을 가까이서 살펴보고 싶었다. 험난한 세상을 강한 비위로 돌파하는 천지애, 그런 아내 덕분에 요즘 한창 기가 살고 있는 온달수, 천지애와 결혼한 달수를 부러워하며 점점 망가지는 한준혁, 그리고 그런 준혁과 전면전을 시작하는 양봉순의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흘러갈까. <내조의 여왕> 10회가 방영된 지 3일 뒤, 11회와 12회를 촬영 중인 <내조의 여왕> 현장을 찾았다.
<내조의 여왕>을 보다가 지독한 농담 하나를 떠올렸다. “20대 때는 공부 잘하는 여자가 얼굴 예쁜 여자를 못 쫓아가고, 30대에는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남편 잘 만난 여자를 못 쫓아간다. 40대에 오면 남편 잘 만난 여자보다 자식을 잘 키운 여자가 제일이다. 그리고 50대에는 얼굴이 예쁘든 공부를 잘했든 남편을 잘 만났든 자식을 잘 키웠든 간에 돈 많은 여자를 쫓아갈 수 없다.” 30대 총각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어려운 농담이다(언제나 얼굴 예쁜 여자가 제일 아냐?). 그런데 <내조의 여왕>을 보니 농담이 아닌 속담처럼 이해됐다.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와 양봉순은 지금 30대를 살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천지애는 빼어난 외모 덕에 과학고를 인문계 못 간 아이들이 가는 학교로 알 정도로 무식했지만 여왕으로 살았다. 양봉순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 그녀의 시녀를 자처했다. 그러나 30대인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튜닝을 시도한 양봉순은 부장님 사모님이 됐고, 천지애는 자신을 영원한 여왕으로 살게 해줄 거라 믿었던 남편이 허우대만 멀쩡한 사회부적응자였던 탓에 짝퉁 명품을 제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내조의 여왕>은 이러한 역전과 재역전의 이야기다. 드라마 초반에는 지애와 봉순의 자존심 싸움이 주된 이야기였지만 요즘에는 그들의 남편인 달수와 준혁의 관계도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며 드라마의 웃음포인트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게다가 각각의 부부관계에서도 기존의 구도를 깰 균열의 기미가 보인다. 드라마의 초반부, 경제불황 속에서 “화장실에 붙은 휴지처럼 딱 붙어 있어야” 하는 직장세계의 비애를 드러냈던 <내조의 여왕>이 이제는 부부관계의 재정립이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내조의 여왕>의 촬영현장 중에서도 이들 부부가 사는 곳을 선택했다. 이들에게는 지금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 천지애와 오달수의 집
4월17일,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MBC 세트장. <뉴논스톱>과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를 연출했던 김민식 PD가 이끄는 B팀이 촬영 중이었다. <내조의 여왕>을 기획하고 메인연출을 맡은 고동선 PD의 A팀은 종로3가에서 촬영을 끝낸 뒤 오후에나 세트장으로 올 거란다.
달수가 월급을 받아오자, 다음날 아침 지애는 남편을 위한 쇼를 준비했다. 김남주의 초절정 애교연기가 빛을 발하는 부분.
B팀이 촬영 중인 신은 지애의 공주병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빽으로 믿었던 은소현이 갑자기 얼굴색을 바꾼 것에 대해 지애는 이유를 분석한다. “헉! 혹시 내가 사모님보다 더 예쁘게 하고 간 적이 있었나? 그게 좀 빈정 상하셨나? 여자들은 그런 거 있거든. 자기보다 예쁜 애랑은 같이 안 놀려고 하는 거.” 지애가 “헉!” 소리를 내는 모습이 문제였다. 촬영감독이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김남주에게도 웃음이 터진 것이다. “감독님, 웃으시면 어떻게 해요!” 이어 지애와 딸 정원이 출근을 하려는 달수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촬영됐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에 율동까지 맞춰 부르는 장면인데, 안무는 정원을 연기하는 방준서에게 일임했다. 두 배우의 율동에 오지호와 김민식 PD도 함께 몸을 맞춘다. 한참을 웃던 김남주가 오지호에게 묻는다. “지호, 춤은 잘 추나?” “에이, 못 춰요. 상체는 되는데, 하체가 안 움직여.” “그게 단점이구나. (웃음)”
주로 밝은 분위기의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김남주와 오지호, 방준서는 조명과 카메라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수시로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눴다. 준서의 목근육을 주물러주던 오지호가 놀란다. “와, 역시 애는 뭉치지가 않는구나. 나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몸을 못 움직이겠어. 송장이 일어나는 거 같아.” 김남주가 남편에게 잔소리하듯 타박한다. “으이그, 평소에 스트레칭 좀 해.” 잠시 뒤, 준서가 극중 달수의 가방을 보며 오지호에게 묻는다. “가방에 뭐 들어 있어요?” “글쎄, 나도 오늘 처음 열어본다.” 오지호가 가방에 든 신문뭉치를 펴자 김남주가 소리를 지른다. “어머, 여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 모델이 새겨진 스포츠신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 아니야~~”라고 말하는 오지호의 표정이 정말 달수다. “PD님, 달수 가방에 이런 거 넣고 다녀요!”(김남주) “에이, 누나 나 정말 아니라니까요.”(오지호) “너 아니라고 하면서 진짜 샅샅이 본다. 하하하.”(김남주)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어머 달수님 어깨에 힘 들어간 거 봐
오지호와 김남주가 이번에는 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퀸즈푸드에 입사해 첫 월급을 받은 달수가 돈을 아예 현금으로 뽑아 지애에게 주는 장면이다. “미련하게… 이걸 다 현금으로 찾아오면 어떻게 해. 이 많은 돈을 집에다 두면 불안하잖아.”(지애) “뭘 이 정도가 큰돈이라고 그래. 얼마나 된다고.”(달수) 허리를 펴고 앉은 달수의 표정이 의기양양하다. 이어지는 지애의 대사. “그래도 자기가 가져다준 돈 중에 최고 많은데 뭐….” 오지호는 이 부분에서 달수의 표정이 무너지는 디테일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역시 지애는 병주고 약주는 아내다. “요즘 같은 불황에 밖에서 돈 벌어오는 게 어디 쉬워?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현찰의 향기야? (돈 냄새를 맡는다) 수고했어 여봉~.”
다음주 방영분을 이번주에 촬영하는 주간지 시스템이라 현장은 빠르게 돌아갔다. 배우들은 그 와중에도 틈틈이 대사를 외우고 맞췄다.
“여보!!”와 “여봉~~”을 함께 구사하는 천지애의 모습에 새삼 그녀의 가공할 능력들을 실감했다. 지금은 비록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만, 그래도 한때 여왕이었던 천지애의 능력은 상당하다. 일단 외모가 받쳐준다. 오영숙이 천지애에게 호감을 보였던 것도 같이 다녀서 모양 빠지지는 않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천연덕스러운 연기력과 애교, 뛰어난 화술, 그리고 한때 여왕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고급스러운 취향, 무엇보다 “사모님,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비위가 있다. 하지만 <내조의 여왕>을 보는 남성들이 ‘나도 저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단지, 천지애의 내조 때문만은 아니다. 언뜻 보면 남편인 달수를 달달 볶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 천지애는 남편에게 밥을 비벼주며 응원하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김민식 PD는 달수가 월급을 가져다주는 이 장면이 단지 천지애의 매력을 보여주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제 다시 관계의 역전이 시작되는 거죠. 처음 시작은 지애와 봉순의 역전이었지만, 달수가 취직하고 돈을 벌어오면서 지애와 달수의 관계도 역전돼요. 이런 역전된 관계에서 오는 웃음을 잘 살려야 시청자가 보는 맛을 잃지 않을 텐데….” 사실 지애가 현찰의 향기를 맡는 장면은 달수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의 앞부분이다. 엄마와 함께 노래를 부른 정원이 아빠에게 말한다. “엄마가 아빠 돈 벌어오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야 된대.” 이제 지애도 퀸즈푸드 부인회의 다른 아내들처럼 되어간다. 아니, 정확히 말해 지애는 남편의 목욕물을 데우고, TV 각도까지 맞춰놓는 양봉순이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 한준혁과 양봉순의 집
오후가 되자, 한준혁과 양봉순의 집에도 손님들이 들끓는다. 고동선 PD의 A팀이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한 스탭이 말하길 “우리 팀이 촬영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건” 처음이란다. 언뜻 봐도 케이블과 공중파 프로그램 카메라가 여러 대다. 한준혁을 연기하는 최철호의 인기를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요즘 <내조의 여왕>의 코믹 포인트들은 거의 대부분 한준혁에게 몰려 있다. 지애가 싸온 달수의 야식을 탐내고, 사무실 책상에서 침을 흘리고 자는 모습 등 드라마 초반에는 레이저를 쏘던 그의 눈이 이제는 휘둥그레지기 때문이다.
이날 촬영한 장면의 대부분도 한준혁의 굴욕이다. 부하 직원에게 달수의 뒤를 캐라고 지시한 준혁이 생각에 잠겨 있다. 이때 아들 혁찬이 영어학습기에서 나오는 문장들을 따라 읽는다.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당신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배신자입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놀란 준혁이 석찬에게 말한다. “석찬아, 긍정적인 문장을 읽어.” 최철호의 대사에 스탭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약속된 대사는 “다른 문장은 없어?”였는데, 최철호가 나름 준비해온 대사에 예상치 못한 웃음이 터진 것이다. 고동선 PD는 최철호가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 요구한 건 반듯한 부장님 이미지를 지켜달라는 거였다. 그런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장면을 잘 따먹더라. (웃음)”
부장님 눈이 점점 휘둥그레지시네요
잠시 뒤 본격적으로 한준혁과 양봉순의 대결이 시작됐다. 관계의 역전은 지애와 달수보다 이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준혁이 TV를 보고 있는 봉순에게 말한다. “여보 나 반신욕하게 준비 좀 해줘.” 준혁의 평소 말투 그대로 부탁이 아닌 명령이다. 고동선 PD는 “부하 직원에게 일을 시키듯이 위압적으로 연기해달라”고 주문한다. 이에 대한 봉순의 대사. “수도꼭지 돌릴 줄 몰라요? 당신이 물 틀어서 직접 해요.” 기가 막힌 준혁이 한번 참고 “목욕타월은 어딨냐”고 묻는다. 얄밉게 사과를 베어먹는 봉순이 대답한다. “직접 찾아봐요. 혁찬이도 그 정도는 해요.”
지애의 집이 작지만 따뜻한 곳이라면 준혁과 봉순의 집은 크고 세련됐지만 차가운 분위기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연기하는 최철호와 이혜영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이어진 촬영은 세 가족의 식사다. 식탁에 앉은 준혁은 김치와 멸치, 김이 놓인 소박한 차림상에 놀란다. “반찬이 이게 다야?” “네 바빠서요. 돈가스라도 먹을래요?”(봉순) “나 기름진 거 싫어하잖아. 뻔히 알면서 굴비라도 좀 구워와.”(준혁) “이제 구워서 언제 먹게요. 그냥 먹어요.”(봉순) 이때 엄마 아빠의 말싸움에 끼어든 아들의 대사가 압권이다. “아빠, 대충 먹어. 경우네 아빠는 엄마가 밥 안 차려줘서 만날 굶고 다닌대. 그거보단 낫잖아.”
이 부분에서 스탭들이 웃음을 참은 장면은 준혁의 ‘벙 찐’ 표정이었다. 아내의 반격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잔뜩 기가 죽은 듯 보인다. 아마 앞으로 준혁이 기죽을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미 직장에서도 지애가 달수를 먹이려 싸온 콩나물 밥을 먹었을 때, 준혁과 달수의 관계도 역전됐다. 집이라고 해서 다를까. “오케이!”를 외친 고동선 PD가 말했다. “이제 이러다 나중에는 빨래까지 시킬지 몰라. 석찬이 팬티도 빨아야 될걸? (웃음)”
# 부부의 관계는 □다?
오후 7시가 넘어가자 “저녁은 언제 먹냐”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틀 뒤에 방영될 분량을 촬영 중인 이들의 저녁식사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잠시 뒤 FD로 보이는 스탭이 떡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나영희 선생님이 파이팅하자며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을 못 먹을지 모르니 다들 두 덩이씩 드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느 인심 좋은 스탭이 준 떡 한 덩이를 먹으며 이제 <내조의 여왕>의 남은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생각했다. 아마도 관계가 역전된 그들은 균형을 맞춰갈 것이다. 달수와 지애, 봉순과 준혁뿐만 아니라 태준과 소현의 관계도 새로운 균형을 찾아갈 조짐이다. 고동선 PD는 “부부관계를 권투선수와 트레이너의 관계로 봤다”고 말했다. “서로가 잘되기 위해서는 강한 파트너십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견제해야 하고, 그러다 다시 만나는 게 필요한 관계다. 나머지 이야기는 그렇게 진정한 부부의 개념을 깨닫는 과정이 될 것이다.”
쌉쌀한 리얼리티로 시작했던 <내조의 여왕>이 이제부터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고찰하는 것일까. <내조의 여왕>의 블랙코미디적인 매력에 재미를 느꼈던 이들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조의 여왕>이 흥미로웠던 건 이 부부들이 살고 있는 퀀즈 팰리스가, 그들이 일하는 퀸즈푸드가, 곧 모든 시청자가 사는 사회의 속성을 녹여낸 곳이었고 드라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의 좌충우돌 분투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드라마가 말하는 인생관은 변하지 않을 듯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부러워도 정작 그는 내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해 안달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재미라는 것. 극중에서 천지애가 결정적 순간에 양봉순에게 일갈할 수 있는 자신감도 거기서 온다. “난 내 남편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넌 니 남편을 잃어버릴까봐 몸부림을 치지. 그게 더 불쌍해.” 현실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기분은 좋은 태도다. <내조의 여왕>은 그렇게 한번 웃고, 한번 짠하다가 잠시라도 인생을 긍정해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