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당시 일본은 전임 총리의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들끓었다. 그 주인공은 금권정치의 대가 다나카 가쿠에이.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가 미국 항공기 제조업체 록히드사의 비행기를 구매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불법 로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 다나카 전 총리의 피의사실이었다. 다나카 외에도 전현직 장·차관을 비롯해 다수의 기업인들이 구속된 이 사태가 바로 전후 일본 최대의 정치스캔들이라 불리는 록히드 사건이다.
일본 정계가 록히드 게이트로 복마전이 됐던 바로 그 무렵, 일본 연예계 역시 전대미문의 사기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신인 여가수 오하라 미도리(大原みどり)의 매니저였던 마마다 쓰기오라는 인물이 가수 데뷔를 조건으로 후쿠오카현의 부농이었던 오하라의 아버지에게 자그마치 2억수천만엔의 돈을 갈취했다는 내용이었다. 오늘날의 가치로 4억~5억엔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도 액수였지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부분은 돈의 사용처였다. 1976년 1월 마마다의 구속과 함께 언론들은 ‘마마다 리스트’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같은 해 3월 연예 주간지인 <아사히 예능>이 수뢰자의 이니셜과 액수가 정확하게 기입된 ‘마마다 메모’를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영화감독, 방송국 거물급 프로듀서, 음악평론가를 포괄하는 그 리스트 속 연예계 인사들은 모두 48명이나 됐다.
전례없는 권력형 비리와 연예계 비리로 얼룩졌던 1976년 일본의 모습에, 박연차 리스트와 장자연 리스트로 흉흉한 2009년 대한민국이 오버랩된다. 중요한 점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가 아닐까. 비록 총리까지 구속되었으되 일본 정계로 흘러들어간 록히드사의 불법자금 내역은 오늘날까지도 완벽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오하라 미도리의 매니저 마마다 쓰기오의 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정황이 충분했음에도 단 한명의 연예계 인사도 조사받지 않았다. 그는 구속 이후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진술만 되풀이했고 그에 따라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만.
딱하게 된 것은 피해자였던 오하라 미도리. 1976년 고전 가요를 리메이크한 <황혼의 방파제>로 음반 12만매 판매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사기사건 이후 메이저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이름을 바꾸고 현재도 음지의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간다.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2009년의 이 리스트 정국을 어떻게 회고할까. 일본인들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록히드 사건과 오하라 미도리 사건을 ‘검은 안개’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