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의 이강길은 ‘엄친아’ 형제들 사이에 낀 외톨박이였다. 성적은 밑바닥이었고, 늘 겉돌았다. 21살의 이강길은 충무로의 이름없는 저임금노동자였다. 선배들이 직배 반대 시위를 할 때 할리우드가 자신을 스카우트할 날만을 손꼽았다. 27살의 이강길은 신주쿠의 배고픈 이주노동자였다. 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몸뚱이 하나로 사는 법을 배웠다. 33살의 이강길은 푸른영상의 늦깎이였다. 장난감 같은 비디오카메라로 삶을 찍는 동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좌충우돌 그의 삶은, 그러나 여기까지다. 무엇이 그를 멈춰 서게 만든 것일까. 2000년, 3개월 약속으로 찾았던 계화도에서 그는 지난 10년을 뿌리내리고 살았다.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운동에 전념했고, ‘어부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바람을 담았다. 4월16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살기 위하여>는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 <새만금 핵 폐기장을 낳다>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연작이다. 두 손 들고 모두 짐 싸들고 나간 새만금에서 여전히 싸움판을 준비하는 이강길(42) 감독을 만났다.
-머리 스타일이 1년 전(<씨네21> 647호, 인디다큐페스티발 감독 3인)과 똑같다. =전라북도 부안읍 칼라미용실 작품이다. (웃음) 부안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할 때 주인을 알게 됐는데 지난해에 덥수룩한 내 머리를 보시더니 잡아끌더라. 그 뒤 곧바로 <씨네21>에서 인터뷰하자는 전화를 받고 ‘아차’ 싶었다. (웃음) 육군 중사 머리잖나. 올해도 지역신문에서 <살기 위하여>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봤다면서 먼저 연락하셨다. 머리 깎고 서울 가라고.
-<살기 위하여>는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첫 상영이 2006년 11월 부안영화제였다. 그 뒤로 지역 인권영화제 등에서 상영을 하고 정리를 하던 차에 우연히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대뜸 작품에 애정이 없는 거냐, 아니면 서울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불만이 많은 거냐 그러더라. 마침 그때가 서울독립영화제가 열리던 때였다. 내년에 출품하면 되지 뭐, 그랬는데 조영각은 속이 터졌겠지. 이후 영화제에서 상영하게 되고 개봉까지 하게 된 건 이상엽 프로듀서랑 배급사인 시네마 달 식구들 덕분이다.
-원제는 ‘어부로 살고 싶다-살기 위하여’였는데. =10년 전에 만든 영화를 아직도 틀고 다닌다고 오해를 많이 해서 뺐다.
-개봉을 앞두고 편집도 다시 했나.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두는 게 내 원칙이다. 그래서 2009년의 새만금은 어떻게 됐나, 라고 물어보면 입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새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새로 찍는 것이 맞다. 과거에 한번 썼던 자료들도 잘 안 쓰는 편이다. 부족해도 ‘내 것으로 하자’는 주의다. 촬영 때 이미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이로 낙인이 찍혀 있어서 사업을 찬성하는 분들의 집회장면 정도만 다른 분이 찍은 걸 썼다.
-촬영 시도를 아예 안 한 건 아닐 텐데. =가서 엄청나게 맞은 적 있다. 폭력배들처럼 대낮에 쇠꼬챙이 들고 위협하더라. 전라북도를 음해하는 세력이라고 욕도 먹었고. 처음에 내려갔을 때는 새만금 사업이 전라북도의 희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던 시기여서 더 그랬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농지용 간척지에 복합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거짓말을 한 결과다.
-3년 전에 완성된 다큐멘터리이지만 문제제기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2006년만 하더라도 새만금 이상 규모의 사업은 없을 거라고 봤다. 그런데 그걸 못 막으니까 대운하 같은 더 큰 재앙이 현실화되는 거다. 얼마 전에 새만금 방수제 사업을 한다는 발표가 났는데, 그걸 위해선 남산 140개 정도를 까야 한다. 바다와 갯벌만이 아니라 육상 파괴가 이뤄지는 거다.
-부안을 처음 내려간 게 2000년이었다. =문규현 신부님이 새만금을 다뤄줄 영상활동가를 찾아달라고 (김)동원이 형한테 부탁했다. 작업 기간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하니 남성 미혼자인 내가 낙점을 받았다. 서울이 갑갑했고, 푸른영상에서도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던 차였다. 그 무렵 독립다큐멘터리는 대부분 1인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었다. 푸른영상도 기동성이나 밀착성을 중요시하는 곳이라 연출자가 촬영까지 도맡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을 전공한 나로서는 막막했다.
-사전에 자료 조사 등 준비를 할 여력도 없었겠다. =자연다큐멘터리 하는 분이 새만금 간척사업 때문에 도요새 보금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것 말곤 변산반도의 주꾸미가 유명하다는 정도. 계화 간척지가 어디에 있는지, 간척사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3개월 뒤에 서울에서 열릴 행사에 쓸 영상물을 만들고 올라오면 된다, 그 정도였다.
-3개월을 작정하고 내려갔는데, 10년 가까이 발을 떼지 못했다. =돌아갈 때 계화도 친구들이 환송회를 해주면서 이슈만 달랑 찍고 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지금은 제작자들이 모두 부안에 있는데 어디 감히 하청 감독이 발 빼고 도망갈 수 있냐고 농을 주고받기도 한다.
-두 번째 연작 <새만금 핵 폐기장을 낳다>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 =2003년 말 부안 핵폐기장 사태 때 서울에서 엄청나게 큰 카메라들이 몰려들었다. 굳이 내가 행사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 것을 찍어보자 싶어서 계화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새 카메라가 모두 서울로 빠져나갔고, 활동가 중에서도 개인적인 이유로 떠난 이가 많았다. 남은 게 없는 거지. 내 숙제구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부안 핵폐기장 문제에 달라붙었다. 돌아보면 뭘 건드리고, 뭘 해야 하는지 시간이 일러준 것 같다.
-새만금은 한국사회의 논란이 중첩된 곳이다. 어민들의 생존권 박탈, 불균등 지역 발전, 핵폐기장 건설, 미군기지 확장 문제까지. =올해 초에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어민들에게 조업을 더이상 하지 말라고 공문 아닌 공문을 보냈다. 베테랑이라고 해도 조업을 위해 물길을 알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떠나는 수밖에 없다. 자존심 갖고 살던 정규직 어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정규직과 도시 빈민이 된다고 생각해보라. 용산 참사가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막이 공사가 끝난 뒤 갯벌에 나갔다가 화를 당한 고 류기화씨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구상했던 장면이 아니었을 것 같다. =촬영을 끝내고 답답해서 배를 2달 동안 탔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다. 육체노동하면 다 잊혀지겠거니 했다. 더 끌면 완성을 못할 것 같은 걱정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인 홍성준 선장에게 말을 하고 여름에 서울로 편집하러 올라왔는데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얼마 뒤 계화도에서 전화가 왔다. 류기화씨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1주일 전에도 만났는데. 나중에 그 장면을 쓰면서 애초 구상했던 편집을 모두 뒤엎었다. 유가족들 때문에 사실 고민이 많았다.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이야긴 그만 하자.
-촬영 중에도 배 타고 일했나. =생존전략이었다. 선원이 되면 선주 집에서 월급을 받고 재워준다. 전문 기술을 가진 건 아니라서 월급은 안 받았다. 일 도와준답시고 그물 당기고 조개망 옮기면서 하장 일을 배웠는데 그게 돈벌이가 됐다. 어부들이 제작자인 셈이다.
-주민들의 영화에 대한 반응이 가장 궁금하다. =찍을 때는 ‘나, 찍지 마라’고 해놓고선 이제는 ‘누구는 몇 장면 나왔는데, 나는 몇 장면밖에 안 나왔다. 난 조연이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대책위원장과 김하수씨가 언쟁을 벌이는 술자리 장면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테이프를 돌려볼까요’, 라고 끼어든다. =감싸는 것이 최선은 아니었다. 대책위원장의 인터뷰로 인해 해수유통을 위한 싸움이 보상을 원하는 다툼으로 비쳐졌으니까. 물론 대책위원장은 운동 경험이 많은 이가 아니라 한명의 주민이다. 도청에서, 군청에서, 경찰에서 얼마나 많은 전화를 받았겠나. 감당이 안되는 거지. 서울의 활동가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대책위원장 곁엔 아무도 없었다. 형님이야 옛날이야기 그만하자고 하시지만, 나로서는 똑같은 일이 앞으로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같이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상처를 낸 거다.
-대법원 판결 뒤 새만금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싸움이라고 한발 물러서는 환경단체 활동가들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마찬가지다. 비난하거나 책임을 추궁하자는 건 아니었다. 다만 과거 서울의 운동단체들이 새만금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고, 그걸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일전에 한 단체 분이 주민 500명의 상경투쟁을 조직해달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막상 서울 와서보니 기자회견문 낭독하고 끝이었다. 주민들이 허탈해했다. 손 한번 흔들려고 1대당 50만원씩 하는 버스 대절해서 서울 왔나. 국회라도 한번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문정현 신부님이 수습해주셔서 무마되긴 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고 말만 내뱉는 방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경찰, 용역깡패들과의 몸싸움 장면에선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린다. =방조제에서 어민들이 경찰과 싸울 때 힘을 보태야 하는 것 아닌가 많이 고민했다. 카메라를 과감하게 내려놓을 줄 아는 게 독립영화의 정신이라고 믿는다. 결국 한손으로 카메라 들고 한손으로는 싸웠다. 사실 그렇게 찍으면 편집할 때 쓸 수 있는 화면이 거의 없다. 카메라는 하늘로 향해 있지, 멀쩡한 화면 건졌다 치면 또 내 목소리가 들어 있지. 카메라 깨지면 후회하고. 몸이야 회복되면 괜찮지만 카메라 부서지면 돈 빌려야 하니까.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을 형, 동생, 이모, 삼촌 등이라 부르고, 그걸 숨기지 않고 드러냈는데. =여성운동하는 분들은 왜 굳이 가족관계 호칭을 끌어들였냐고 묻더라. 사실 처음에 만났던 이들이 또래 친구들이었다. 시골 말로 ‘갑’인 거지.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준 그들을 통해서 주민들을 소개받았는데 그들한테 이모, 형님이다 보니 나 또한 이모, 형님이라고 불러야겠더라. 이를테면 갑봉이 삼촌은 인터뷰의 의미를 잘 모르신다. 다만 내가 가면 ‘강길이 왔는디 그냥 지나칠 수 있냐’며 숙모한테 술상 봐달라고 하신다. 혼자 드시면 핀잔 들으니까. 내 입장에선 감독과 대상이 동등하게 만나는 기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두 흩어질 때 남아서 싸우고, 다들 물러설 때 앞장서서 싸우는 이는 여성들이다. =조직을 만든 건 남성들이었지만 실제 움직인 건 여성, 어머니들이었다. 서울에 가서 싸워야 한다고 맨 먼저 나섰던 이도 여성들이었다. 철거싸움을 하는 곳에 가도 항상 용역깡패들과 맞서 싸우는 이들은 여성들이다. 남성들이야 전략 세울 때만 해도 초토화할 기세인데 막상 그렇게 못한다. 또한 여성들의 발언이 훨씬 살갑고, 표현력도 풍부하고, 또 순덕 이모처럼 심오하다.
-연작 중 첫 번째 작업 때가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그때는 눈물났다. 편집실을 빌렸는데 비용을 내지 못했다. 일단 테이프 원본을 저당잡혀놓고 나왔다. 돈을 빌리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나중에 몰래 들어가서 가편집 릴만 카피해서 도망나왔다. 다른 편집실에서 완성한 뒤 나중에 찾아가서 무릎꿇고 사죄했다. 2편 때는 일주아트하우스나 미디액트 등이 생겨나서 장비를 저렴하게 쓸 수 있었던 편이었다. 전라북도에 있을 때는 문정현 신부님이 딱하게 여기셔서 지인들 통해서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배려를 많이 해주셨고.
-일본영화학교에서 유학했다는 건 보도자료 보고 알았다. =군대 갔다와서 선배 소개로 여기저기 영화사를 기웃거렸다. 장산곶매에서 심부름도 했고, 태흥영화사에서 이름없는 스탭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 진출이 꿈이었다. (웃음) 직배반대 투쟁할 때 선배들 보면서 ‘영화 잘 만들면 되지, 뭐 하는 거냐’ 비웃었으니까. 그렇게 몇년을 보냈는데 내가 몽상을 꾸고 있었구나 싶더라. 일단 집에서 도망가자, 한국에서 도망가자 그랬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돈을 빌렸는데,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일본이었다. 신주쿠에서 홈리스 생활도 했다. 그러다 과거 인연이 있던 재일동포 촬영감독을 만났는데 비자 얻고 공부하라고 하시더라. 나를 일깨운 건 타지에서의 육체노동이었던 것 같다. 밥 굶고 거리에서 자면서 나를 날카롭게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자연다큐팀에 소속되어 진짜 촬영다운 촬영을 하나 싶었는데, IMF가 터져서 한국에 들어왔다.
-귀국 뒤 얼마 안돼서 푸른영상에 들어갔다. =그전에 저예산 장편영화의 촬영감독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기존 촬영감독님들이 이번에 양보하면 정식으로 협회 등록하게 해주고 입봉시켜주겠다고 하시더라. 물의를 일으키기 싫어서 모 촬영감독 아래서 스탭으로 일하기로 했는데, 만날 일본어 원서 번역만 했다. 내가 번역한 자료들은 다른 선배 촬영감독 이름으로 협회 책자에 실리곤 했는데, 써보지도 않고 자료를 짜깁기한 필름 사용기였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광고 일을 하던 도중에 푸른영상이 집 근처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연다큐멘터리 하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웃음)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도 컸다.
-구성원으로 쉽게 받아주던가.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안 오더라. 전화하면 기다리라고만 하고. 그러다 김동원 감독이 <행당동 사람들2-또 하나의 세상>을 찍을 때 3일 촬영만 도와달라고 했다. 일종의 테스트라고 생각을 해서 갔는데 카메라가 VX 1000이었다. 집에서 대소사 찍는 장난감으로 촬영을 하다니. 그럼에도 푸른영상에 머물렀던 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위한 작업을 하는 곳”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고문관 소리 꽤 들었겠다. =시스템 만들어야 한다는 둥. 베타캠으로 찍어야 한다는 둥. 분란만 일으켰다. 다들 이강길은 언제 그만두나 보자, 그랬으니까. 김동원 감독을 비롯해서 김태일, 이상엽, 류미례 감독 등이 잘 다독여줘서 그나마 버틴 거다.
-따지고 보면 새만금으로 보낸 건 귀양 아닌가. =유배지. 고마운 유배. 그게 아니었으면 문규현,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해서 계화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아무런 조건없이 작업을 도와줬던 스탭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싶다.
-새만금 말고 다루고 싶은 게 있나. =코믹다큐 해보고 싶다. 다큐는 너무 진지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다. 다큐멘터리 또한 극영화만큼 웃음을 전달할 수 있다. 제 주변에 자칭 삼류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좌충우돌 삶도 소재가 될 수 있을 거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우디 앨런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들 세상이 변하기 전에는 그거 만들기 어렵겠다고 하지만. 하긴 가을에도 새만금 방수제 싸움 찍어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