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포함하여 모스필름 회고전을 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나서 시간이 되면 가봐야겠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갈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자 그냥 쓰기로 한 생각. <증기 기관차와 바이올린>은 생각해보니 필름은커녕 DVD로도 다시 본 적이 없다. 질 나쁜 불법 비디오로 오래전에 보았으니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는 이반이 바다를 달리는 장면을 포함해서 몇 장면이 기억난다.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늘 거창하고 커다란 모험처럼 느껴지지만 내게 특별한 경험을 준 건 아니었고, 그보다 비디오로 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를 필름으로 다시 보았을 때 그동안 내가 완전히 다른 색감의 영화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영화가 시작되고 초반에 보이던 그 물풀의 녹색은 같은 영화를 보았지만 비디오 테이프에서는 없던 색이었고 생경하게 다른 느낌을 일으켰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타르코프스키가 관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의 물질에도 관심을 가질 줄 아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지금도 <거울>과 <잠입자>인데, <거울>의 초반부 장면은 분명 영화가 점잖은 기다림의 예술이 아니라 은밀한 구성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잠입자>는 그 이상한 물질의 방까지 도착하고 나면 이 세상의 진짜 새로운 삶의 통로를 지난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그리고 어떤 회고전에서 <향수>를 필름으로 마지막 본 날 서울 시내는 안개에 싸여 있었던 것 같다. <희생>은 늘 이 영화 자체보다는 90년대의, 그 당시는 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리운 영화 관람의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들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쳤던 다큐멘터리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는 타로코프스키의 다른 이름)의 한 장면이 문득 생각난다. 망명 뒤 병상에 누워 마지막 작품 <희생>의 편집을 지시하던 노쇠한 타르코프스키의 모습이. 지금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본 사람보다 못 본 사람이 더 많을 텐데 그들이 보게 되면 이 영화들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개인적인 느낌의 연대기를 늘어놓았다. 못 갈 것 같은 누군가를 위해 당신이 대신 가서 즐거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