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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마지막 묘비명을 세우다

그의 특별하고 격렬한 고해성사를 들려주는 <그랜 토리노>

* 스포일러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 몽족 소녀 수는 같은 몽족의 청소년 갱단에 폭행을 당하고 차마 대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급박하게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사건 자체가 끔찍하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지만 긴장을 더 가속시키는 건 그 다음을 예측할 때다. 이 정도 수위의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앞으로 더 큰일이 있음을 알리는 예고라는 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따라온 이들은 직감한다. 한 소녀에 대한 무차별 폭력행사까지 일어났을 때 남은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걸 떠올리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그랜 토리노>의 정점이라고 부를 만한 코왈스키의 마지막 행동으로 이어진다.

코왈스키가가 찾은 곳은 수를 짓밟은 갱단이 모여 있는 바로 그들의 집 안마당이다. 그는 여기에 두 번째 온 것이다. 처음에는 뚱뚱한 한 녀석의 얼굴을 짓밟은 다음 경고만 남기고 떠났지만 지금 다시 돌아와서는 결판을 지을 태세다. 이때 그가 이 갱단의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를 기억해야 한다. 그가 장총을 겨누고 험악하게 했던 말은 “내 마당에서 나가라”였다. 그는 자기의 사유지에 침입한 그들에게 거침없이 총을 겨누며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적의 안마당에 지금 침입해 있는 것 또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안에 서 있다.

코왈스키의 최후가 의미하는 것

서부극에서 선인이 찾아오는 것은 방문이지만 악인이 찾아오는 것은 침입이다. 또는 악인의 소굴로 마침내 주인공이 찾아가는 것은 결투의 신청이자 오래된 장르적 피날레다. 서부극에서 종종 그들은 주거지 혹은 사유지를 지키고 말뚝의 안과 밖을 나누기 위해 싸운다. 혹은 그 분쟁의 애매하고 초연한 해결자로 이스트우드가 들어서곤 했다. 여기서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이 침입과 방문의 미묘한 반복과 차이다. <그랜 토리노>는 코왈스키의 집, 타오와 수의 집, 백인이라고는 몇 남지 않은 동네의 골목길, 3주마다 한번씩 찾는 이발소 등 몇개의 정해져 있는 장소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 사이를 은연중 활기있게 채우는 것이 방문과 침입이다. 서사는 이것을 계기로 연쇄된다. 타오는 그랜 토리노를 훔치기 위해 코왈스키의 집에 들어왔던 어설픈 침입자였다. 타오는 그 일을 사과하기 위해 코왈스키를 다시 방문하게 되고, 타오의 실패 때문에 갱단이 몰려와 코왈스키의 마당 안으로 넘어 들어오자 그는 총을 들고 나선다. 타오를 구한 코왈스키를 마을의 몽족 사람들은 영웅이라 여기며 음식을 들고 방문하고 코왈스키는 마침내 몽족 집안의 초대를 받아 수와 타오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어느덧 지하실의 냉장고를 함께 꺼내도록 도와달라며 타오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수’의 사건을 계기로 갱단이 모인 집으로 향한다.

서부극의 인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 방식이자 그 마지막 장으로서 코왈스키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결단은 둘 중 하나다. 그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죽게 되는 것. 늘 이스트우드가 살아 나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코왈스키가 꺼낸 것은 총이 아니라 라이터였다. 겁에 질린 갱단의 아이들은 성급하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코왈스키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진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므로 이번 일은 목격자가 많다고 경찰이 말한다. 그러니까 목격자를 남겨두기 위한 죽음, 그것이 코왈스키의 목적이었다. 코왈스키가 그들의 안마당에 갔다는 건 그 오래된 총잡이처럼 남은 협상이 없다는 뜻인데 그는 협상없는 자살을 위해 그 자리에 간 것이다.

스스로 마지막을 초래한 사내라는 이 부분은 이 영화가 이스트우드의 것이기에 영화의 서사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얼마간 그의 과거 영화들을 끌어안고 퍼져 나간다. 처음부터 이스트우드의 영화경력 자체를 소재로 놓고 쓰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정교하게 직조된 닉 솅크의 각본은 총잡이, 늙은 무법자, 대리부모 등으로 살아온 이스트우드의 과거 캐릭터들의 종합이고 그 때문에 코왈스키의 죽음을 넘어 배우 이스트우드의 작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그랜 토리노>가 배우 이스트우드의 고별사라는 것이 알려진 이상 그의 이 행위가 어떻게 자기반영적 의미를 구축하는지 생각해보는 건 중요하다. 코왈스키의 죽음이 벌어지기 전 몇초간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생각이 부딪혔을까. 그가 총을 꺼내 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과 과거에 그가 무차별한 응징자였던 사실이 서로 엉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즉 <그랜토리노>에서 코왈스키의 결정은 늘 앞선 한번의 행위 그리고 그 다음의 행위까지 이어져야 진의를 알게 된다. 유사한 상황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는가를 환기시키는 힘으로 이 영화는 긴장감을 주거나 우리의 추인을 허락한다.

젊은 신부는 중요한 맥거핀?

수가 그녀의 백인 친구와 길을 걷다 흑인 아이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할 때 코왈스키가 그녀를 구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그는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처음에는 허풍스럽게 손가락 총을 꺼내 쏴 보인다. 그러나 뒤이어 정말 총을 꺼내 흑인 아이들의 얼굴에 들이민다. 이 장면이 갱단의 안마당에서 같은 제스처를 취하는 코왈스키를 볼 때 겹친다. 코왈스키가 총을 뽑으려는 것처럼 가슴쪽으로 손을 넣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행위를 할지 알 수 없다. 이미 같은 행위를 한번 보았기 때문에 더 판단할 수 없다. 그건 손가락 총일 수도 있고 진짜 총일 수도 있다. <그랜 토리노>는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할 때 필시 앞선 장면을 도로 끌어내어 환기시키며, 그 환기는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의 장면들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 영화가 이스트우드의 배우로서 작별인사이자 그러기 위한 자기반영적 영화라면 내적인 구조로 코왈스키의 과거와 이스트우드의 과거를 이중적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만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그랜 토리노>는 아내의 장례식으로 시작하여 코왈스키 자신의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코왈스키가 마리아의 이름을 읊으며 죽었으며 마치 예수의 형상인 것처럼 쓰러졌지만 그는 아내처럼 종교적 부활을 약속받고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다. 코왈스키의 행동은 오로지 지상의 총잡이의 믿음에 기인한 것이며 이스트우드가 해오던 해결책이다. 혹은 성서의 기록과는 유사하지 않고 실은 정확하게 거스른다. 이때 영화의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젊은 신부의 역할을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실제로 그는 코왈스키의 옆이 아니라 반대편에 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코왈스키의 중요한 맥거핀이다. 아니 맥거핀이라니. 그는 성심으로 코왈스키의 고해성사를 받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번의 주의환기가 필요하다.

<그랜 토리노>에는 두번의 고해성사 장면이 있다. 한번이 아니라 두번의 고해성사. 코왈스키가 신부를 찾아가 하는 건 보았으나 나머지는 좀더 은연중에 지나간다. 하지만 성당을 찾지 않거나 신부를 앞에 두지 않았다고 하여 그가 고해성사하지 않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코왈스키는 갱단을 찾아가기 전 젊은 신부에게 죄를 털어놓는다. 이것이 첫 번째 고해성사다. 그때 그가 지은 죄는 세 가지다. 1968년 부인이 옆방에 있는데 다른 여자와 키스한 것, 보트의 엔진을 900달러에 팔아치우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 아들 둘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고 그럴 방법을 찾으려 하지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코왈스키는 마지막까지 신부에게 한국전 참전 당시 자신이 한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경험이 무엇보다 코왈스키의 인생에서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건 몽족의 무당이 “과거에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에 삶에 만족을 못한다”라고 말했을 때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코왈스키의 표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서 고백한 세 가지 죄악과 참전 군인으로서 저질렀을 죄악 중 무엇이 더 그를 괴롭혀왔을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바에야 성당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코왈스키는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걸 고백할 생각으로 거기에 간 건 아닌 것 같다. 죽음을 앞에 두고 면도를 하고 옷을 새로 맞춰 입는 것과 같은 통과 의례 중 하나로 생전에 아내가 그토록 바랐던 일을 해주기 위해 가는 것이다. 코왈스키의 아내가 생전에 유언처럼 부탁한 말은 코왈스키가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고 젊은 신부는 말한다. 그러니 이때 이 장면이 존재해야 하는 영화적 이유는 따로 있다. 성당에서의 장면은 코왈스키가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끝내 무엇을 하지 않는가를 보여준다. 코왈스키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지 않는지, 거기서 하지 않은 걸 어디에서 하는지를 각인하는 것이 이 장면의 영화적 존재 이유다. 그건 코왈스키가 갱단을 처단할 때 흑인 불량배들에게서 수를 구할 때의 이미지가 불려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스트우드의 대답은 바로 다음 신에서 이어진다.

“너는 그러면 안돼”

누나의 일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타오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코왈스키밖에 없다. 수의 사건이 일어난 직후 코왈스키는 신부와 타오를 번갈아 상대하게 되는데 이건 마치 이제부터 코왈스키가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를 묻는 줄타기의 서사와도 같다. 코왈스키는 결국 신부를 따돌리고 타오와 결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를 따돌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짓는다. 타오와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코왈스키는 “한국전에서 사람을 얼마나 죽였냐”는 타오의 질문에 한 “13명쯤”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때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는 이내 답하지 않고 먼저 계단을 오른다. 그런 다음 타오를 지하실에 두고 철문을 잠가버린다.

지하실에 타오를 가둬 놓고 코왈스키는 촘촘한 격자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대치한다. 고해성사의 장소를 마련하는 칸막이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스트우드가 다른 장소가 아닌 이 철문을 사이에 두고 타오와 대화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칸막이의 유사함으로 신부와의 고해성사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 역시 그렇다. 물론 여기는 성당이 아니지만 두 장면의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이스트우드는 다른 장소 혹은 다른 앵글 혹은 다른 모양의 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성당에서의 장면과 시각적으로 너무나 유사한 자리를 설정한 뒤 여기서 코왈스키의 진심을 고백하게 한다. 그는 미뤄두었던 대답을 낮은 고함으로 토해낸다. “사람 죽일 때 기분이 어떠냐고? 그래 끝내주지. 안 좋은 건 애들을 죽이고 받은 훈장이지. 항복하려는 애들 말이다. 어린 군인들이 너처럼 겁에 질려 있었어. 난 그 아이들 얼굴에 라이플을 갈겼던 거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 생각을 안 하게 돼. 너는 그러면 안돼.”

나는 이것이 코왈스키의 두 번째 고해성사이자 앞선 것보다 훨씬 더 진심어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앞에서 피한 말을 지금 여기에서 하며 지하실에서 타오와 함께 있을 때 받았던 질문을 철문을 사이에 두고 답한다. 어투나 상하의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코왈스키는 진작부터 나이 여하를 막론하고 거친 욕설을 좀 섞어야 그것이 사내들의 진짜 농담이라고 믿는 노인이지 않은가. 코왈스키는 자기의 방식대로 회개한다. 그건 자신이 미래로 남겨둔 아이에게 거친 말투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처럼 해괴하고 난폭한 고해성사의 장면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영화 속 코왈스키라면 그것이 바로 사내들의 고해성사 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코왈스키는 협상없이 그의 방식으로 회개하였으며 우리가 본 것처럼 스스로 시대착오적인 방식을 통해 책임을 다했다. 그의 회개와 책임이란 오로지 타오가 거기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이분법이지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연출, 출연을 함께한 많은 영화 속에서 단지 두 차례 죽었다. 그중 총에 죽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출연만 했던 영화 중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몇편의 영화를 포함하더라도 그가 맡은 캐릭터의 죽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한 건 <고독한 방랑자>에서였고 또 한번이 <그랜 토리노>다. 근 30년 전 <고독한 방랑자>에서 한 유랑 음악인은 그를 따르는 어린 조카에게 꿈과 기타를 남겨주고 병사하였고, 지금 <그랜 토리노>에서 옹고집 노인네는 자기를 따르는 이웃집 소년을 대신하여 총탄에 죽었고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72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고독한 방랑자> 이후 이스트우드가 카네기홀에서 재주 피아노 연주를 한 적은 있지만 영화 속 뮤지션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그런 그가 스크린에서 스스로 자기의 묘비명을 세웠다. 그는 정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방랑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삼촌(이스트우드)의 쓸쓸한 입관식 날 어설픈 기타 연주를 들려준 다음 기타를 들고 미래로 뻗은 저 먼 길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던 소년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랜 토리노를 타고 시원스레 뻗은 길을 내달려 멀어져가는 타오의 모습이 담긴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도 보인다. 한쪽은 아직 늙지 않은 이스트우드의 중후한 음성으로 노래가 깔리고 있고(<고독한 방랑자>), 또 한쪽은 노쇠한 이스트우드의 음성으로 노래가 깔리다가 젊은 제이미 컬럼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바뀐다(<그랜 토리노>). 두 장면이 유사한 느낌을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두 영화는 모두 영혼의 상속인을 남기는 이야기다. 몇 십년 전 그건 백인 아이였지만 지금은 몽족의 아이다. 코왈스키는 그 아이에게만 죄를 말했고 그 아이를 희망으로 남겼다.

“저 애들은 가망이 없어”. 코왈스키는 갱단을 찾기에 앞서 말버릇처럼 이 말을 각기 다른 자리에서 몇 차례나 되풀이한다. 가망이 있는 애들(타오)과 없는 애들(갱단)이라는 이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이분법. <그랜 토리노>는 혹은 이스트우드는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이분법에 속해 있지 않다. 선과 악이라는 더 낡은 이분법에 속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종종 이 점이 감동적이다. 그때 이스트우드는 책임과 선택의 문제를 그 누구도 닿지 않은 심연 안에서 묻기 때문이다. 코왈스키는 타오를 남겼지만 이스트우드는 더 많은 이들을 남길 것이다. 그들이 지금 이스트우드의 작별에 슬퍼하고 있다. 이 글은 그들이 보내는 수많은 작별인사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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