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를 곳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산생활 고참들이 다니러 온 때는, 아직도 추위의 서슬과 봄바람의 애교가 시시때때로 섞여들던 2월 말께였다. 그들은 눈과 낙엽에 묻혀 있는 땅에서 신기하게도 먹을 것을 캐냈다. “봄에 올라오는 어린 것은 웬만하면 먹어도 괜찮아요.”
아궁이에 불만 피우면 역류하는 연기로 매일 훈제되곤 했던, 그리고 그 이유를 고장난 굴뚝의 팬 탓으로 돌렸던 우리에게, 굴뚝의 가운데 덮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그들이었다. 거름과 제초제의 용도로 쓰이는 목초액을 받기 위해 굴뚝 가운데 부분에 덮개를 설치하고 그 밑에 항아리를 놓아둔 것이었다. 굴뚝의 뚜껑이 닫힌 것도 모르고 불을 때워댔으니, 아궁이가 에라 이 무식한 것들, 연기나 먹어라, 한 것이다.
고참들은 “땅에서 솟는 풀은 한번 살짝 뜯어 먹어보세요. 먹어도 괜찮으면 먹고, 이상하다 싶으면 안 먹으면 돼요”라고 했다. 생체실험을 통해서 자연학습을 하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라는 것이다. 배움이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 잘난 문명이니 시스템이니나, 태어나자마자 낚아채서 바로 노동자감으로 훈련시키기에 돌입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싼 돈 주고 약초교본이니, 식물도감이니 사서 챙겨 들고 왔던 내가, 다시 한번 깨갱하고 만 순간이었다. 학교깨나 다녔다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나도 처음에 제일 궁금했던 것이 이름이었다. 이 풀의 이름은 뭘까, 이 나물의 이름은 뭘까. 그런데 살아보니, 이름 따위는 아무리 알고 있어도 헛것이었다. 이게 먹을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먹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먹어야 하는 것이냐, 먹고 남는 건 어떻게 보관하고 저장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지금 사는 곳에서도,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시집가서 늙은 아줌마들(일명 할머니들)을 붙잡고 “이 풀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어보면, “아, 이건 노란 꽃이 피는데 줄기랑 이파리를 데쳐서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먹으면 아주 맛있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퀴즈 대한민국>에 나가서 일확천금할 욕심이 아닌 바에야 그 이상 뭘 더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주위를 온통 뒤덮은 마른풀과 잡목들을 베어나가자 한때 대가족이 살면서 농사를 부쳤던 것이 틀림없는, 5층이나 되는 계단식 논밭 터가 하나씩 드러났다. 나는 마치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흥분상태에서, 어머어머, 이 골짜기에 어떻게 이런 돌 축대를 쌓고 밭을 일구었을까, 탄성을 연발했다. 골짜기에 평평한 밭을 다지기 위해 밭의 면적보다 몇배나 되는 면적으로 위의 흙을 떠받치게끔 설계된 돌 축대는, 잉카의 건축물만큼 인공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사람의 손으로 쌓았다는 사실이 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예술이라고 하는 거겠지.
원추리의 새싹을 처음 본 것이 바로 이맘때였다. 층계밭 부근 골짝 언저리마다 파릇파릇 솟아나는 어여쁜 그것들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는데, 하동의 장날에 내려갔다가 이름을 알아냈다. 고사리, 취나물, 땅두릅들의 어린순도 지천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다 생전 처음 본 것들이었다. 암을 고치려고 서울살이를 접고 혼자 내려와 이곳에서 십수년째 정양 중이신 아랫집 아줌마가 놀려오셨다가 고사리며 취, 땅두릅, 마의 어린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덕분에 하루에 몇개씩 풀이며 나물의 정체를 배워나갔던 당시의 나는, 갈데없는 인생살이 초딩이었다. 학교 초딩과 다른 점이라면, 배우는 게 너무너무 즐거웠다는 사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