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 만인가. 한때 오달수는 ‘충무로 최고의 조연 연기자’로 꼽히며 숱한 영화에 얼굴을 비췄다. 2006년만 해도 그가 이렇게저렇게 출연한 영화는 무려 9편. 하지만 언젠가부터 스크린에서 그를 만나는 건 어려워졌다. 2007년에는 <우아한 세계> 한편에 출연했고, 지난해에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가루지기>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지나친 다작에 염증이 나서 그가 영화를 외면하는 건가, 아니면 너무 자주 보이는 모습에 질린 관객이 외면하는 건가, 궁금해하는 와중 오달수는 <그림자살인>을 통해 스크린에 ‘컴백’했다. <그림자살인>에서 그가 연기하는 순사부장 오영달은 헛다리 짚는 수사방식으로 웃음을 줄 뿐 아니라 연쇄살인사건의 열쇠까지 쥔 핵심 인물 중 하나다. 반가움이 앞서지만 궁금증도 풀어야겠다. 달수씨, 그사이 무엇을 하셨나요?
- 영화에서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지난해 <가루지기> 이후 첫 영화인데. = 촬영한 것으로 따졌을 때 딱 1년 만인 것 같다. 그동안 영화에 많이 출연 안 했던 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영화도 별로 없었고, 공연도 많이 했다. <전우치> 같은 영화는 연극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에 출연하느라 참여하지 못했다.
- <그림자살인>은 때가 잘 맞았나보다. = 2년 전인가, 시나리오가 나오자마자 박대민 감독이 내게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때 보고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작품도 물론 좋았지만, 주변에서 박대민 감독을 많이 칭찬했고 추천도 했다. 그리고 우리집까지 찾아와서 딸아이 주라고 작은 인형까지 전해줬다. 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배우인지는 몰라도, 그런 마음씀씀이로 미뤄볼 때 디테일하게 잘 찍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영달이라는 인물은 초반에는 양념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사건의 열쇠를 쥔 중요한 인물이더라. = 나도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런 대립각에 서 있는 것까지는 못 느꼈는데 영화를 찍고 보니까 그렇게 보이더라. 사실, “찾으시는 사람이 많아” 같은 대사를 툭툭 던지면서 했으면 모르겠는데, 뭔가 있는 듯 은밀하게 말하니까 그런 느낌이 전달된 것 같다. 나는 오영달이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기보다는 영화 속 주요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 그동안 악역을 많이 했지만, 오영달은 기존 영화에서보다 더 강한 악역인 듯 보인다. = 영화를 찍으면서 캐릭터가 좀 바뀌었다. 애초에는 좀 가벼운 캐릭터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너무 가벼워지면 안될 것 같더라. 감독 또한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사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강남의 연습실에 다 모여서 동선을 긋고 연습도 했는데 막상 현장에 가니까 다르더라. 그래서 조금 더 세게 밀어붙이는 쪽으로 바뀌었다. 기왕 그럴 것이었으면 좀더 비열하게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특히 초반부에 날림 수사를 하는 장면이 워낙 코믹하다보니 그러한 변화가 더 의외로 다가오는 듯하다. = 사람의 모습이란 게 여러 가지 아닌가. 비밀을 숨기고 음모를 꾸민다 해도 한편으로는 단순무식하고, 막연한 감만으로 수사를 하는 그런 인물이니 바보스런 연기를 해줘야 한다고 봤다.
- 평소 ‘악역 또한 연민을 자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그런 허술한 모습 때문인지 완전히 미워하긴 힘들게 되는 것 같다. = 연민까지는 아니겠지만 막판에 가서 어떤 징벌을 당하니까 관객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 약간 아쉬웠던 점은 캐릭터가 단선적인 듯해 맛이 조금 떨어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 다 끝나고 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각 캐릭터를 팍팍 살려서 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면 좀더 파닥파닥한 느낌, 날것의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았을까. 그래서 촬영 당시에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어봤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지금의 완성본처럼 깔끔하게 깨끗한 느낌으로 정리하는 방향이 맞았다고 본다.
- 제작자나 감독이 특정한 캐릭터나 특정한 연기 스타일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모되는 느낌은 없나. = 소모… 하시라고 한다. 이용하려면 이용하고, 소모시키려면 소모시키라고 말이다. (웃음) 솔직히 그런 데 대한 우려가 없다면 도 튼 사람 아니겠나. 대중이 빨리 싫증을 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 게 있다. 연극무대에 있는 후배들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연기를 10년 이상 하면 연극이라는 무대가, 연기를 하면서 쌓아온 세월이 배신을 안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대중에게서 잊혀진다 해도, 관객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도 불안해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 사실, 그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까닭에 관해 나름 생각하면서 혹시 2000년대 중반에 워낙 다작을 했기 때문에 숨고르기에 들어간 게 아닌가 추측했다. = 내 성격상 ‘그동안 다작을 했으니까 이젠 좀 쉬어야겠다’, 이런 것은 없다. (웃음) 좋은 작품이 있으면 무조건 하는 거다. 만약 관객이 오달수라는 배우에 질려서 안 본다면 그걸로 끝인 거고. 물론 그사이에 내용이 그리 좋지 않은데다 그동안 내가 보여줬던 모습을 반복하는 캐릭터를 담은 작품도 제안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영화는 ‘그러세요’ 하고 만다. (웃음)
- ‘조연 전문 연기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데, 그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배우들을 보면 주연 타이틀을 달기 위해 때때로 무리수까지 두곤 하던데 주연에 대한 욕망은 없나. = 글쎄, 주연 타이틀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조연을 오래해서 그런가? (웃음) 물론 그런 역할이 주어진다면 열심히 할 자신은 있다. 주연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간 내내 감독과 함께 작업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도 필요하다. 빨리 내공을 쌓아야지. 연기 나이도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 <박쥐>에도 출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신하균씨 캐릭터의 직장동료 역할이다. 신하균씨 역할은 김옥빈씨 배역의 남편이고, 송강호 선배가 맡은 신부의 친구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요일마다 마작을 두러 신하균의 집으로 가는 인물이다. 비중이 크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작품도 많이 못 받았고 받더라도 엉성한 게 있었는데, <박쥐>는 그동안의 내 답답함을 한번에 뚫어준 영화 같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 전주영화제 ‘숏숏숏’ 프로젝트의 한편인 <백개의 못, 사슴의 뿔, 그리고 생수통>에도 출연했더라. = 옴니버스영화 전체의 주제가 돈인데, 이 영화에서 나는 직원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는 갑갑한 사장으로 나온다. 조은지씨가 임금을 받으러 온 직원인데, 거의 둘이 끌어가는 영화다. 이 사장은 월급 줄 돈이 없지만, 돈 때문에 이상한 관계가 되는 것도 싫어해서 괜히 날씨 이야기라든가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다. 돈이 죄지, 인간에게 죄가 있겠냐,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 그동안 영화에 안 나온 대신 한 이동통신 회사 광고를 통해 얼굴을 봤던 것 같다. 오주상사 말이다. =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그 CF를 만든 감독님과는 예전에 왕뚜껑도 찍었는데 오주상사도 잘됐던 것 같다. 요즘에는 F4에 밀렸지만. (웃음) 하여간 영화 일을 하면서 대단한 분들을 많이 뵙게 되지만, 장미희 선배님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장미희 선배님이야말로 정말 과거의 로망 아닌가. 여전히 아름답고 성격도 좋으시더라.
- 광고 출연이 아무래도 생계에 도움이 됐을 것 같다. = 촌티나는 말일지 몰라도 광고라는 게 노동량에 비해서 얻는 게 많다는 생각도 들더라.
- 마치 죄책감을 가진 듯 들린다. = 죄책감? 아니, 쪽팔리다는 거다. (웃음)
- TV드라마 출연은 생각해보지 않았나. = 일단 제의도 없었고…. (웃음) 무엇보다 드라마는 아직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드라마는 무섭더라. 시스템도 그렇고, 전 국민이 본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요즘에는 화질이 너무 좋아서 얼마나 자세하게 보이냐. 연기하는 것도 디테일해야 하고. 그래서 선뜻 덤비기가 어려운 거다.
-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대표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신기루만화경의 활동이 활발하더라. = 요즘 연극도 제작비가 많이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사비를 털어서 제작하는 경지는 넘어섰다. 다행히도 공연 지원 신청을 할 때마다 잘되고 해서 지난해 10월부터 4편을 계속 했다. 내가 출연했던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부터 <어느날 문득, 네개의 문> <그녀의 춤바람>, 그리고 지금 상연하는 <설공찬전>까지.
- 그 와중에 다른 극단 작품인 <마리화나>에도 출연했다. = 극단 마방진에서 만든 작품이었다. 서울 올라와 사귄 친구 중 가장 친한 고선웅씨가 쓰고 연출하는 작품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 극단에서는 원망을 한다. 네 극단이나 챙기라면서. (웃음) 어차피 올해에도 우리 극단에서 한 작품 해야 한다. 연말쯤 <먼데이 P.M. 5>에 출연하게 된다. 사실 대표라고는 해도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쪽팔리는 얘기지만 밥 사주고 술 사주는 정도? 그런데 그게 또 만만치 않다. 티도 안 나고. 극단이 어렵지만 자생력을 갖기 위해 노력 중이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다른 대표가 이끌어가겠지만.
- 혹시 종신제 대표란 말인가. = 그렇다. 극단 정관에 ‘대표는 1인이 한다. 대표는 종신제다’ 뭐 그렇게 나와 있다. (웃음)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그만큼 내게 믿음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나.
- 연출을 해볼 생각은 없나. = 1994년인가 한번 해봤는데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일단 연출자 입장에 서니 답답해서 못 보겠더라. 그냥 이렇게 연기하면 되지, 왜 저러나 싶어서. 역시 내겐 배우가 맞는다. 그리고 외로운 것도 못 참겠더라. 연출할 때 일인데, 연습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잠깐 정리를 하고 단원들이 늘 가는 술집에 갔더니. 아무도 없는 거다. 그런가보다 하고 나오려는데, 미심쩍어서 안쪽 방문을 열었더니 배우와 스탭들이 숨죽이면서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다. 내가 너희들하고 상종하면 개다, 막 그랬는데…. (웃음) 하여간 나는 배우쪽이다.
- 배우가 천직이라고 느낄 때가 있나. = 언젠가 한 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뭘 가르친 게 아니라 연극을 지망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였다.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받겠습니다”, 그랬더니 “만약 배우를 안 했다면 뭘 하셨을 것 같냐”고 물어보더라. 그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노숙자요”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 나는 ‘배우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노숙자라면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 노숙자 했으면 너무 잘했을 것 같은데. (웃음)
- 요즘에도 술을 많이 마시나. = 확실히 40대에 들어서니까 술이 약해지더라. 역시 술 앞에서 까불면 안된다. 예전에 조지훈 선생이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는 수필에서 본인의 단수가 낮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공감이 된다.
- 그럼 연기로는 몇단쯤 된 듯한가. = 주도는 유단일지 몰라도 ‘연도’(演道)는 ‘무단’(無段)이 아닌가 싶다. 연기의 세계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조금씩 변하기야 하겠지.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나 자세 같은 것은 말이다. 겸손해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건방진 적도 없었지만 그러지 말자고 자꾸 최면을 걸고 있다.
- 그래도 내년이면 무대에 오른 지 만 20년이 되는데, 연기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과정 아닐까. 깨우치는 과정 말이다. 2001년인가 <인류 최초의 키스>라는 작품을 할 때 연극하는 주진모 선배님이 ‘연기는 각(覺)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참 촌철살인이라 할까, 정말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 무엇을 깨우친다는 말인가. =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해서 각한다는 말일 거다. 어쩌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10분 전쯤에야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