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프랑스의 세계적인 조각가)은 차를 구겨서 분노를 표출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나요?” “저는 모든 희로애락을 물방울에 녹여서 없앱니다.”
평생 물방울만 그려 ‘물방울 작가’로 불리는 김창열(80) 화백은 한 프랑스 관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감정이든 메시지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데 익숙한 서양 관객에게, 김 화백의 작품은 참으로 동양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화폭에 아롱거리며 맺힌 물방울은 곧 떨어지거나 증발할 듯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이든 물방울의 역할은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모습으로 내용물을 감싸고 있다가 언젠가는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정적이고 차분하다.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와 닮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정적인 물방울은 김창열 화백이 과거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벗어난 결과다. 김 화백은 한국전쟁 당시 스무살이었다. 중학 동창의 절반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길가에는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시절이었다. 눈을 감거나 꿈을 꿀 때마다 참혹한 풍경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다 물방울을 발견했다. 1972년의 어느 날, 작가는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불현듯 득도했다. “분노든 불안이든 공포든 모든 것을 ‘허’(噓)로 돌릴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다.” 무엇이든 부드럽게 포용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물방울은 김창열 화백이 과거의 아픈 기억과 화해하는 방식과 닮았다. 그렇게 완성된 물방울 그림에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오랜 시간 매듭지어진 작가의 인내와 용서가 그림에 알게 모르게 축적된 덕분일 것이다.
김창열 화백의 개인전이 4월29일까지 표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2007년에 제작한 작가의 최근작도 포함된다. 작품의 제목은 ‘회귀’(Recurrence). 40여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물방울을 반복, 변주해온 노작가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