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도 두판이나 했다. 또 40분을 낭비했다. 이게 ‘길티’는 분명한데, 왜냐고? 지금도 이렇게 40분의 허송세월에 죄의식을 느끼며 후회하고 있으니까. 근데 ‘플레저’는 맞는겨? 그거 하는 시간이 과연 내게 즐거움이나 쾌락을 주나? 여하튼 하니까, 후회해놓고 또 하니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는 모양이라고 추정한다. 근데 그게, 인지하지 못하는 즐거움이 즐거움 맞는겨? 그러고 보니 ‘길티’도 아닌 것 같다.
<씨네21> 편집장이 바람 새는 소리 섞인 그 특유의 목소리로 이 글을 청탁할 때 원했던 ‘길티’는 도덕이나 관습 같은 걸 위반하는, 사회적으로 좀 위험한 어떤 것이라는 의미였을 거다. 그가 원한 ‘플레저’는 남다른 자극을 동반하는, 범상치 않은 쾌락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그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길티 플레저’라는 말은, 도발적이고, 관습 타파적이고, 범상치 않고, 자극적인 뭔가를 지칭했을 거다.
쉽게 말해서 야한 거. 사실 도발적이고 관습 타파적이고 범상치 않고 자극적인 것 가운데 성과 관련되지 않는 게 한 10%나 될까. 편집장의 말 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져 들리지 않았던 게 “야한 거, 야한 거”였을 거다. 나더러 그런 걸 쓰라고? 내가 노출증 환자여? 다른 이들은 뭘 썼는지, 지나간 <씨네21> 몇권을 뒤져봤다. 야한 건 없고, 나름 야하려고 애쓴 게 한둘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길티 플레저’ 원고를 받아보면서 편집장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여러 번 나왔을 것 같다.
그럼 그게, 내가 쓰려고 하는 게 뭐냐고? 에… 또… 컴퓨터를 켜고… 윈도 화면 왼쪽 아래 시작 버튼을 누르고… 거기 열리는 항목 중에 게임을 누르고… ‘지뢰 찾기’는 아니고…(한글엔 소문자 없나? 작게 쓰고 싶은데)… 스파이더. 벌써부터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다. 스파이더 게임이 도발적이냐, 자극적이냐, 관습 타파적이냐? 아니요, 그냥 범상한데요. 야하지도 못하고요. 그러나 단어 뜻대로라면 이건 내게 분명히 ‘길티 플레저’다. 하고 나서 후회하고(길티), 그럼에도 또 하는 건 어쨌든 즐겁기 때문(플레저) 아니겠어?
3~4년 전부터인 것 같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내가 집중을 안 하는 건가, 뇌가 노후해져서 어쩔 수 없이 예열에 시간이 걸리는 건가 궁금해하다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후자였다. 할 수 없다, 예열하는 동안 하자고 시작한 게 스파이더였다. 처음엔 재미있었고, ‘고급’으로 승률이 50%를 넘을 때는 쾌감도 있었다. 그래도 하루 이틀이지 2년, 3년 넘어가면서 그냥 관성이 돼버렸다.
카드 뒤집는 데 무슨 고난도의 머리 쓰기가 필요할까. 그걸 밤이고 낮이고 해서 2년 반 된 내 데스크톱의 스파이더 게임 횟수가 1234회다. 게임당 평균 20분에 하루 8시간 근무 기준으로, 두달 출근해 줄곧 스파이더만 했다는 얘기다(참, 내 노트북도 있는데…). 그래도 그 시간들이 쓸모가 있었다. 이 글의 소재가 됐으니까. <씨네21> 원고료가 얼마더라? 이 꼭지 10만원도 안될 텐데. 장하다, 스파이더. 두달 동안 (넉넉잡아) 10만원 벌었다. 벌었으니, 컴퓨터에서 스파이더를 삭제하자. 딱 한판만 하고.
임범 일간지 기자를 오래 하면서, 영화담당 기자도 오래 했다. 문화부장도 했다. 신문사 그만두고 나서 영화 일 한다고 하지만 성과가 없다. 이런저런 잡글들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