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째 주말.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일본과의 첫 번째 대전을 기다리며 오후 내내 뒹굴뒹굴했다. 꽤 많은 채널들은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 야구의 승승장구를 재방송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봉달이’ 이봉주를 봤다. 3월15일 서울국제마라톤에 출전한다는 광고였다. 40살, 40번의 완주 도전이라고 했다. 은퇴를 앞둔 마지막 경기라고도 했다. 잠깐,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그가 달렸던가. 기억이 전혀 없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의 역주는 어렴풋했지만, 그 이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궁금했다. 마라토너의 평균 은퇴 시기는 30살 전후. 10년을 더 달린 이유가 궁금했다. 10년 전 그는 이미 지구를 네 바퀴 이상 돈 사나이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아시안게임과 주요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3월15일 대회에서도 그는 약속처럼 끝까지 달렸다. 2시간16분46초, 14위였다. 마지막 기록을 두 다리에 새긴 그를 며칠 뒤 찾았다. 그가 몸담았던 삼성전자 육상단 숙소는 릴레이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이틀 동안 예정된 인터뷰가 무려 18개라고 했다. <씨네21>은 그중 여섯 번째 주자였다.
-내일 인터뷰는 12건이라 들었다. =뛰는 게 더 쉽다. 가족들하고 휴가 가려면 이틀 동안 인터뷰를 다 해야 한다.
-휴가는 어디로 갈 건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야지. 애들의 발언권이 가장 크다. 물놀이하는 곳도 좋을 것이고. 큰아이가 공룡에 빠져 있다. 공룡세계엑스포가 열리는 고성도 후보지다.
-고성은 국내 마라톤 선수들이 동계훈련을 많이 하는 곳이잖나. =15년 가까이 거기서 훈련했다. 아이들이 놀러오면 공룡박물관에도 가곤 그랬는데.
-애들 떼놓고 부부 여행을 간다면 어디 가고 싶나. =그럴 순 없는데. (웃음) 처음에 만나서 데이트한 곳이나 여행 갔던 곳들을 찾아보고 싶긴 하다.
-훈련에 들어가면 수염을 기른다. 경기 끝나면 수염은 곧바로 깎나. =끝나면 바로. 3개월 이상 기른 거라 여러 번 밀어내야 한다. 그래야 깎인다. 깎을 때 홀가분하고, 뭔가를 벗어던지는 기분이 든다.
-이번 대회는 마지막이라 좀 남달랐을 텐데. 출발선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 들던가.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완주하자는 생각이 제일 앞서더라. 마지막이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야 주위로부터 손가락질을 안 받을 것 아닌가.
-첫발 떼는 순간 완주 여부나 대략의 기록을 예상할 수 있나. =연습하는 과정에서 이미 안다. 내 몸 컨디션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이번 레이스는 어땠나. 예상에 근접한 기록이었나. =요번엔 그 기록도 못 뛸 거라 생각했다. 워낙 안 좋아서. 완주만 하는 것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막상 뛰어보니까 되더라.
-어느 시점이 가장 힘들던가. =초반이 너무 힘들었다. 처음부터 선두권에 안 섰다. 그냥 내 페이스에 맞춰서 뛰었다. 20km 지점에서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30∼35km가 가장 버거웠다.
-20km와 30∼35km 지점은 전성기 시절에는 중요한 승부처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선두권을 유지하며 30km까지는 여유있게 따라갔을 거다. 이번엔 아예 엄두를 못 내겠더라. 내 페이스에 맞춰서 가자, 가 내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뛰면 안되는데 싶더라. 약간은 비참했다.
-충분히 이뤘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것 같다. =누군가가 보기엔 그 정도 했으면 잘했다고 하겠지만, 스스로는 인정이 안되는 거지.
-동료들이, 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달라고 하더라. =딴생각하면 레이스를 뜻한 대로 펼칠 수가 없다. 옆 선수 견제하고, 코스 떠올리고, 어느 지점에서 물 먹고, 어느 지점에서 스퍼트를 해야 하나만 생각한다.
-우승을 차지했던 2001년 보스턴마라톤대회 때는 어땠나. 한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뛰면서 아버지 생각 한번도 안 했나. =(웃음) 많이 했다. 그때는. 뛰기 전부터. 장례 치르고 곧바로 훈련 갔다가 곧 보스턴으로 갔으니까.
-다른 생각이 힘이 될 때도 있나 보다. =아버지 생각은 괜찮다. (웃음)
-결승점에 도달하면 트랙에 누워버리고 싶지 않나. 수고했다는 말조차 받아줄 힘이 없을 텐데. =골인이구나 그거밖에 없다. 정말 그로기 상태지. 누가 와서 말 걸면 귀찮기도 하다.
-티를 낼 순 없잖나. 카메라가 있으니. =티 내면 언론에 기사 안 좋게 나가잖나. (웃음) 언론이나 국민의 관심이 사실 부담이긴 했다. 어느 정도는 뛰겠지, 상위권에 입상하겠지, 그런데 (출발) 총소리 들으면 다 잊어버린다.
-뛰다가 배 아픈 적 없나. =배만 아픈가. 다리도 아프고. 그 순간만 넘기면 되는데 그걸 못 넘으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뛰다가 화장실 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시합 때는 다행히도 없었다. 연습 때는 중간에 화장실 자주 간다. (웃음)
-42번 풀코스에 도전했고, 40번 완주했다. 우연인가, 의지인나. =이렇게 오래 선수생활을 할 줄 몰랐다. 숫자 개념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뛰고 난 뒤 여기저기서 몇번 뛰었다고 나온 걸 보고 알았다. 욕심이 생기더라. 40번 채우자. 40살이기도 하고. 이 숫자들이 어떤 의미 같고.
-다들 40번 완주 기록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고는 하는데 ‘유일한 기록’이라고 쓰진 않더라. =나보다 더 뛴 선수가 있는지는 찾아봐야 될 거 같다.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 뛴 선수는 없는데. 외국쪽은 모르겠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마라톤을 한 선수는 있다.
-어떤 스포츠에서든 ‘포기’는 전략 중 하나다. 마라토너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왜 굳이 완주를 고집했던 것인가. =시합 하나 준비하려면 3개월 이상이다.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준비해야 하는데 순간 힘들다고 그만두기엔 준비한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또 한두번 포기하면 버릇이 된다. 누군가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가르쳤다.
-첫 풀코스에 도전해서 완주한 때가 1990년 71회 전국체육대회였다. =페이스고, 감각이고 뭐 그런 게 없었다. 멋모르고 젊음 하나 믿고 뛰었다.
-풀코스 도전은 대학 3학년 때가 적절하다고들 한다. 좀 빨리 도전한 편이다. =마라톤을 하려면 일단 5km를 일정 시간 내에 뛸 수 있어야 한다. 이후 단계별 연습을 해야 하고, 거기에 기량이 늘고 연륜이 붙어야 한다. 요즘엔 특히 혹사하지 않으려고 어린 나이에는 풀코스 도전을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일찍 시작하길 원했고, 여건도 그랬다.
-‘오르막’과 ‘더위’에 강하다. 마라토너로서의 성실함과 지구력은 세계 최고라고들 했다. 반면 순간 스피드가 약하다는 지적도 많이 들었다. 선천적인 재능의 부족에 대한 지적을 들을 때는 씁쓸하지 않았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타고난 게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 남다른 몸을 갖고 있었다면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거다.
-형이 유년 시절 레슬링을 하다 그만뒀다고 들었다. =가까운 누군가가 실패한 과정을 봤으니까.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성실이 집안 내력인가. =집에서 누워 있는 사람은 없다. (웃음) 어머니는 항상 움직이신다.
-100m는 몇초에 뛰나. 가장 잘 뛰었을 때. =14초 정도. 어떨 땐 16초도 뛴다. (웃음)
-어릴 적엔 100m 잘 뛰는 애들이 1000m도 잘 뛰었던 것 같다. =1000m까진 그런다.
-어릴 때도 달리기가 좋았나. =고향이 충남 천안군 성거읍 소우리다. 산으로 들로 뛰면서 노는 게 훈련 아닌 훈련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3km쯤 됐는데, 만날 친구들하고 선배들하고 누가 더 빨리 뛰나 내기하고 그랬다.
-1등했나. =아니. 1등은 못해봤다.
-마라토너로서 가장 행복한 해는 1996년이었을 것 같다. 동아, 후쿠오카국제마라톤대회 등에서 우승했고,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도 땄다. =최고의 해였다. 미국의 <트랙 앤드 필드>라는 잡지에서 세계랭킹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은메달 따고 환호했다. 금메달도 아닌데 저렇게 좋아하나, 하는 이도 분명 있었다. =태극마크 달고 올림픽 출전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첫 올림픽에서 은메달 땄으니 너무 좋은 거다. 은메달 따고 기죽어서 고개 떨구는 게 별로 보기에도 안 좋았고.
-메달은 기대했나. =주위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잘한 거다, 라고 했다.
-이봉주 시대의 개막이 이뤄진 1996년에 황영조는 은퇴했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떨어졌고. 황영조의 은퇴를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했을 것 같다. 자신의 몇년 뒤를 보는 듯한 느낌은 없었나. =저때가 되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은 물론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 믿어지지가 않는 거지.
-황영조와 이봉주를 흔히 비교한다. 대조되는 캐릭터로, 또 라이벌로. 하지만 황영조는 이미 92년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황영조를 라이벌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다. =황영조 선수가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던 건 맞다. (웃음) 내 경우에는 운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런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황영조 선수에게 가장 뺏고 싶었던 게 뭐였나. =폐활량. 그런데 심장을 바꿀 순 없고. 타고난 재능이 부러웠다. 그때는.
-코오롱 시절 ‘왜 황영조는 핸드폰 주고 나는 안 주냐’고 한마디 했다던데. 그동안 꾹 참고 있다가 불만을 터트린 게 고작 핸드폰이었다니. =나도 핸드폰을 달라, 뭐 그런 건 아니었다. (웃음) 처우 차이가 너무 커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다.
-본인도 특별대접 받은 거 아닌가. =그러네. 음.
-특별대우 받으면 운동에 전념할 수 있으니 좋지만, 팀 동료들과의 관계를 감안하면 나쁜 점도 있을 것 같다. =느껴봤으니까 그 기분 안다.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잘 어울리려고 하고. 회식 때도. 그런데 언제서부턴가 후배들이 많이 어려워한다.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코치님보다 나를 더 어려워한다.
-라이벌을 꼽자면 누군가. =황영조 선수도 있고, 김완기 선수도 있고. 그들과 같이 뛰던 코오롱 시절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운동하러 누가 빨리 나가나 신경 쓰기도 하고, 몰래 운동하려고 기를 쓰던 시절이었고.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장 애썼던 시기다.
-훗날 환갑 기념으로 마라톤 대결을 신청하고픈 선수는 누구인가. =(애틀랜타올림픽 우승자인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 3초 차로 져서 더 그렇다. 마라톤이 42.195km가 아니라 43km였으면 했다. 역전할 수 있었는데. 아휴, 그때는 조금만 더 트랙이 길었으면 했다니까.
-마라톤은 세계기록을 갖고 있는 이가 다음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당신 또한 1996년은 행복했지만, 1997년은 부진했다. 지난 20년 동안의 레이스를 보더라도 승전보와 슬럼프를 매년 오갔다. =마라톤은 어떤 스포츠보다 변수가 많다. 순간 잘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실력 좋은 복병도 많다. 1998년 로테르담국제마라톤 우승자인 론체로는 무명선수였다. 앞으로 치고 나가기에 초반에 힘 쓰다 나가떨어지겠지 했는데, 끝까지 가더라. 중간에 멈춰 선 것을 보고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달리더라니까.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개인적으로도 가장 안타까운 순간일 것 같다. 몸 상태가 최고였으니.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바람에 선두권에서 떨어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엉망이 됐구나. 그래도 국가대표니까. 중계를 보는 국민이 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부딪친 선수를 원망하진 않았나. =기분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뭐라고 할 수 있나. 다 잘 뛰려다 그런 건데.
-1997년 슬럼프 때 술을 많이 마셨다고 들었다. 술 좋아하나. =즐긴다. 시합 끝나고 여유있으면 좀 한다.
-많이 마시나, 오래 마시나, 빨리 마시나. =많이 먹기도 하고, 오래 먹기도 하고, 빨리 먹기도 한다. 주량은 고무줄이다. 어떨 땐 잘 먹고 어떨 땐 조금인데 취하고.
-다음날 운동하려면 빠른 시간 마셔야 하니, 폭탄주도 마시겠다. =가끔. 일찍 자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려고 한다.
-필름 끊긴 적도 있나. =그럼. 아무래도 틀에 박힌 생활하다가 느슨하게 풀리면 마시게 된다. 스트레스 해소에 괜찮은 것 같다.
-술 먹고 도로를 달리거나 하는 뭐 그런 술버릇은 없나. =없다.
-2시간7분20초라는 한국신기록을 세웠던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 고 정봉수 감독과의 불화로 결국 코오롱에서 나간 뒤 외인구단처럼 떠돌며 훈련해서 거둔 결과였다. 당시 오인환 감독에게 1천만원을 훈련비로 내놓았다던데. =집사람에게 말해서 모아뒀던 상금 중 조금을 내놓은 거다.
-마라토너의 평균 연령은 서른이다. 결혼을 하면서 은퇴를 고민한다. 은퇴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점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끝나고 난 뒤였을 텐데. =금메달 못 딴 아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라. 그래서 다음, 또 다음 하다 보니까 마흔이 된 거지.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하고, 뭐 그러다 보니 오뚝이라고 불렸던 것 같고.
-승부욕은 남들보다 강한가. =가만 보면 모르겠는데, 뭔가 하면 지는 걸 싫어한다. 구기 게임을 하든 내기를 하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
-고스톱도? =화투는 안 친다.
-고3 때까지는 사실상 두각을 내지 못했다. =고3 때 마지막 기회인 전국체전에서 3위 해서 턱걸이로 특기자 혜택을 받았다. 안됐으면 평범한 직장인이 됐을 텐데.
-서울시청 소속일 때 홍콩에서 열린 육상대회에서 장애물 경기도 뛰었다고 들었다. 허들 경기였나. =장애물도 넘고, 물 웅덩이도 넘고. 꼴찌했을 거다. 요령을 전혀 모르고 초반부터 전력질주했다. 그런데 장애물 하나 넘을 때마다 순위가 뒤로 밀렸다. 치욕스러운 경기였다.
-오인환 감독은 멋내는 걸 좋아한다고 책에 썼더라. 시계 차고, 머리띠 하고, 수염 기르고, 뛴다면서. 시계도 안 차고 뛰는 선수들도 있는데. =최근에 와서 그런 거다. 턱수염은 애틀랜타올림픽 준비하면서부터 길렀는데, 열심히 운동하자는 뜻에서 그런 것이고. 그냥 과정 중 하나다.
-쌍꺼풀 수술이야 땀이 눈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해도, 2004년 올림픽 때는 앞쪽에 머리카락 2004개를 심지 않았나. 그런데 2천 가닥 정도면 발모 효과가 있나. =없는 상태에서 심으면 효과가 있다. (웃음)
-아내는 턱수염 있는 모습을 좋아하나, 깔끔한 걸 더 좋아하나. =다 좋아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황영조 선수 소개로 만났다고 들었다. =첫인상이 맘에 들었다. 차분한.
-첫사랑이었나. =그렇다. 첫사랑이다.
-아내에겐 몇 번째 사랑이냐고 물어본 적 있나. =아니, 안 물어봤다. 첫사랑이겠지. (웃음)
-짝발로 유명하다. 5mm 이상 발 크기가 차이 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맞춤 신발이 없던 시절엔 레이스를 끝내면 한쪽 발에는 피가 흥건했다는 기사도 봤다. 그런데 말이다. 신발을 두 켤레 사서 한쪽씩 신으면 되지 않나. =특별히 한쪽 발이 길다고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어느 날 재보니까 크게 차이난다는 걸 알았고. 항상 피가 났던 것도 아니다. 1, 2번 그랬는데 기사가 그렇게 난 거지.
-한국에서 운동하면서 가장 서러운 게 뭐였나. =서럽다고까지 말할 건 아닌데. 마라톤이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관심을 안 가져주니까, 게다가 성적까지 못내면 더 그렇고.
-대회를 4∼5일 앞두고 마라토너들은 식이요법을 한다. 9끼에서 12끼까지 고기만 먹다가 이후에는 밀가루 등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된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 =고기는 양념없이 익혀서만 먹는다. 두끼 정도까진 먹을 만한데 그 뒤부터서는 넘기는 것뿐만 아니라 탄수화물이 고갈돼서 배가 허전하고 힘이 하나도 없어진다. 그 뒤에 몸이 탄수화물을 간절히 원할 때 밀가루나 찹쌀밥을 먹는 거다.
-영화잡지 인터뷰이니 관련 질문도 좀 해야겠다. 영화는 자주 보나. =가끔. 액션을 좋아한다. 스티븐 시걸도 좋고.
-마라토너 이봉주에 대한 영화를 직접 감독한다고 하면 누구를 캐스팅하겠나. =이문식씨. 웃기게 잘할 것 같다.
-지도자 생활 준비를 위해 캐나다 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점이 올해 말이 될지 내년이 될지는 아직 못 정했다.
-아이들도 마라톤 시킬 건가. =시키고 싶은데, 소질이 없다. 운동감각이 영. 운동할래, 라고 몇번 물어봤는데, 과학자 한다고 하더라.
-이제 사진 찍어야 한다. 아, 전에 광고 찍을 때 NG 없이 수월하게 잘 찍었나. =많이 냈지. 새벽에 나가서 다음날 들어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