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기업의 기업PR TV CF를 촬영하기 위해 서울의 여기저기를 헌팅했다. 컨셉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한컷을 찾는 것이었다. 1천만명이 넘는 인구가 사는 수도 서울. 어머어마한 인구를 수용할 만큼 넓은 땅을 가지진 않았지만 63빌딩만큼이나 하늘 높이 쌓아올린 집들 덕분에 아직 400만, 500만명은 족히 수용이 가능한 거대도시 서울의 랜드마크를 찾던 중 뜻하지 않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남산타워는 서울에 10살짜리 생일 초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서울의 대푯값’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남산타워 다음에는 또 뭐가 있는가. 스스로 되뇌었지만,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물론 발전한 대한민국의 한컷에 63빌딩을 포함시킬 수도 있다. 1985년에 준공했으니 올해로 24살이 되는 ‘청년’ 63빌딩은 20여년 전에는 정말 최첨단의 빌딩이었다. 그렇지만 강산도 두번이나 발칵 뒤집어지듯이 바뀐 탓에 이제는 최첨단의 빌딩이라고 말하기가 무색하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기엔 내 마음속의 ‘63빌딩’이 너무도 큰 터라 일단 여의도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 다음의 랜드마크는 또 뭐가 있는가. 고민의 연속이다.
서울에 남산타워 말고 뭐가 있지?
물론 강남 테헤란로의 야경도 발전한 한국의 한컷으로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서울의 한 부분일 뿐 ‘서울’ 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강은 어떨까? 서울의 젖줄이자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가장 크게 기여한 일등공신이 바로 한강이다. 한국전쟁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한국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이 또한 매우 타당성있는 후보임에 틀림없다. 1900년에 처음 한강에 교량이 놓인 이후 현재는 서른개의 ‘대교’(大橋)를 거느린 한강이야 말로 마치 ‘성장판 주사’를 맞은 듯이 커버린 수도 서울의 ‘동맥’이다. 또한 한강변에서 캔맥주를 부딪히며 사랑을 키워가던 ‘연애의 뚝방 전설’이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 서울의 사촌형들은 내가 살던 동해에 바캉스를 오곤 했다. 당시 사촌형들이 수영을 하는 모습은 꽤나 근사해 보였다. 거의 ‘빤스’ 수준의 수영복을, 아니 ‘빤스’를 입고 있었던 나에 비해 사촌형들은 멋진 수영복에 물안경까지 착용한, 말 그대로의 서울 아이들이었다. 당시 나는 형들에게 “서울에는 바다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수영을 잘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형들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서울에도 바다만큼이나 넓은 강이 있어.” 그때 서울 아이들에게 한강은 바다만큼이나 넓은 물이었을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빛을 발하는 남한산성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 그림을 만들어보니 아무래도 63빌딩을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한강을 한눈에 보려면 반포 근처에서 강의 서쪽을 봐야 하는데 이곳도 모두 아파트 단지들이라 적절한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63빌딩 전망대에 올라가봤다. 항상 곁에 두고 보는 63빌딩에 직접 올라가본 서울 시민들이 의외로 적다고 하는데, 한번 올라보기를 권한다. 정말 생각보다 괜찮다. 63빌딩 전망대는 한강과 남산 그리고 일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강 서쪽의 유일한 포인트다.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그리고 살짝 휘어졌지만 늠름한 한강, 그리고 그 옆을 가득 메운 수많은 자동차들이 ‘발전한 것 같은’ 한국을 보여준다. 물론 아파트가 너무 많이 보여 멋진 그림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가본 곳은 서울과 성남의 접경에 있는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은 그야말로 ‘한컷’ 그 자체였다. 높은 곳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높은 빌딩이 없다. 비록 일출의 모습과 서울을 한 장면에 담지 못해 아쉽지만 대신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남한산성 포인트의 진면목은 빛을 발한다. 사진의 전면으로는 테헤란로와 잠실 삼성동의 코엑스가 위치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는 성수대교의 ‘Y’자형 교각에서 나오는 녹색 불빛이 다리를 빛낸다. 그리고 맨 뒤 우리의 주인공인 ‘촛불 꽂은 남산’까지 보이니 이보다 완성도 높은 그림도 없을 것이다.
여러 날을 ‘발전한 서울’의 장면을 찾아다녀서 촬영도 잘 마쳤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수십년 전에 좀더 성장에 대비한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만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예전처럼 보이기 위한 ‘양적 성장’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내실을 다지는 ‘질적 성장’에 심혈을 기울여 ‘한국다운 한국, 서울다운 서울’이 다시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