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고양이를 보면 납치하는 상상을 한다. 꼭 주인이 있는 고양이여야 한다. 길고양이들은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아 납치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에 ‘남’의 동물에 대해 느끼는 더러운 욕망도 가세한다. 흔히 말하는 ‘갯과’ 고양이에겐 별로 감흥이 없다. 하지만 도도한 고양이, 사람이 그 앞에서 소녀시대 춤을 추든 제발 좀 쳐다봐 달라고 네발로 기든 ‘하! 꺼지셈’하는 표정을 지으며 외면하는 고양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느끼고 만다, 그 시커먼 욕망을.
그냥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남의 고양이를 낚아채 안고 달려가는 내 뒷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쾌감을 느낀다. 이 상상 속의 나는 늘 같은 모습으로, 긴 갈색 웨이브 머리에 바바리리코트를 입고, 스틸레토 힐을 신고 있다(실제로는 부스스한 단발 머리에 낡은 티셔츠- 무릎 나온 청바지- 운동화라는 만날 똑같은 차림이다). 어깨 위의 고양이가 내려달라고 몸부림친다. 내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오는데,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리고 나와서 내 체취에 머리가 아프다(실제로는 향수 살 돈이 없다). 힐 굽이 부러질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을 탕 닫고, 방 안에 고양이를 내려놓는다. 자잘한 물건들은 다 치워놓았지만 침대 밑을 막지는 않았다. 고양이가 들어가야 하니까. 나는 놈이 침대 밑 어둠 속에서 최초의 수치심과 공포를 삭인 다음, 혼란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 우주의 비정함과 악랄함, 자신을 납치당하게 방치한 주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곱씹도록 시간을 충분히 준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놈은 마침내 배고픔을 느낀다. 침대 옆엔 기름기를 뺀 참치캔 내용물이 놓여 있다. 집에서 먹던 사료보다 질이 떨어지고 건강에도 안 좋아 보이지만, 그리고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지만, 너무 피로하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놈은 참을 수가 없다. 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밖으로 나와 그릇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은 다음이다. 문제는 더 먹고 싶다는 것. ‘저 비열한 X한테 재롱을 떠느니 죽는 편이 낫겠지만, 배, 배가 고파…….’ 놈은 드디어 도도함의 가면을 벗고, 죄악으로 가득한 나의 탐욕스러운 손을 핥고, 몸을 내 팔에 비비며, 어색하게 야옹 소리를 낸다… 주인을 잊고…! 그러면 나는 터져나오려는 황홀한 비명을 꾹 누르며 숨을 고른 다음, 차갑게(하아, 힘들어라) 비웃어주는 것이다. “고작 그거였어? 하! 쉬운 것 같으니. 더 해봐. 식빵을 구워, 그럼 연어 줄게. 우유도 있는데 꾹꾹이 좀 해보지? 왜? 못하겠어? 부끄러워? 그럼 더 굶든지.”
고양이 주인 여러분, 이건 그냥 망상입니다. 실제로 하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고양이를 기를 수 없는 환경- 남편의 비염, 친정어머니의 반대, 그리고 무엇보다 반려동물을 들이기엔 너무도 심각한 저 자신의 게으름- 속에서 참다 보니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망상 자체가 죄라는 생각이 들어 고양이가 있는 곳에 가는 일도 자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끔 하는 저 망상은… 너무나 즐겁습니다. 죄송합니다.
윤이형 소설을 쓸 때는 소설가, 쓰지 않을 때는 백수이자 좀비로 ‘길티’한 인생을 보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셋을 위한 왈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