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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연] “난 이단아지, 나쁜 놈이지, 이제 익숙해”
장미 사진 이혜정 2009-03-11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감독 원태연

비현실적이다. 맞다, 사실 그런 이야기다. 홀로 남은 소년, 소녀가 등을 맞대고 한집에서 살면서 서로 눈물을 닦아주는 러브스토리. 소녀는 아름답게, 소년은 건실하게 자라지만, 선의를 품었다 해도 침략자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남자가 둘 사이에 끼어들고, 누군가는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는 뻔한 결말. 그렇지만 조금 솔직해지자. 가슴 시린 어느 저녁이라면, 당신 역시 그림같이 예쁜 남녀가 그림같이 예쁘게 사랑하다 그림같이 예쁘게 이별하는 그림같이 예쁜 멜로영화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까. 게다가 권상우, 이보영, 이범수 주연에, 지휘자로 이름을 올린 이가 원태연이다.

아니, 원태연이라니? 맞다. 90년대 초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같은 시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시인 원태연이, 맞다. 남녀주인공의 이름부터 케이와 크림이라니 감상적인 그의 시쓰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 아닌가. 주특기인 러브스토리를 데뷔작으로 선택한 시인, 아니 감독 원태연을, 3월3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인처럼 안 생겼다는 말을 듣기 싫다”던 그는 의외로 줄담배에, 말수 적고, 돌려 말할 줄 모르며, 사격을 배운 탓에 상대의 눈을 지그시 조준하는 딱 남자 같은 남자였다.

-개봉을 앞둔 심정은. =떨린다.

-그전에도 시나리오를 몇편 쓴 걸로 아는데 이번 시나리오는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공동작가가 있다. 그 친구 노트 저쪽에 ‘사랑하는 여자 결혼시키기 대작전’이라고 적혀 있더라. 베스트셀러 극장 공모할 거라고. 그거 로맨틱코미디로 하면 안될 것 같고, 나한테 맡기면 슬픈 멜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된 거다.

-기본적인 얼개는 본인이 짠 건가. 각본가에 다른 사람 이름이 함께 올라와 있고, 각색가도 따로 있던데. =일단 초고를 썼고. 그걸 다른 분이 각색했다.

-원래 대답을 단답형으로 하나. (웃음) =말주변이 없어서. 길게 말할까? 알겠다.

-각색가가 초고에서 덜어낸 부분, 첨가한 부분은 뭔가. =덜어낸 부분은 거의 없다. 구성이나 순서를 좀.

-예를 들면? =솔직히 말해도 될까. 내가 작가잖나. 근데 작은 아이디어나 그런 것들 있잖나. 그걸 사람들이 너무 자기 것으로 착각하더라고. 그런 게 싫어서 그분들 이름을 크레딧에 넣은 거다. 시나리오는 내가 다 썼다.

-시집에 등장할 것 같은 대사들도 등장하던데 이런 건 즉흥적으로 쓰는 편인가. =그렇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게 재떨이 좀 갖다 달라, 혹은 그냥, 같은 대사들. 아주 평범한 말인데 그 사람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말. 사랑은 양치 같은 거다, 그런 건 설명이 필요한 대사잖나.

-사랑하는 남자가 원한다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여주인공은 이해하기 어렵던데. =그걸 어떻게 말로 이해를 시키겠나. 구조 같은 걸 말하자면 이건 할 말이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크림은 당장 강원도로 내려가서 집을 팔아서 산삼을 사야 한다, 고 생각한다. 케이는 그런 크림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느끼고. 산삼을 파는 사람은 사기꾼이어야 한다. 그리고 둘이서 단칸방으로 옮겨서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같이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그린 이유는 뭔가. =안타깝잖아.

-안타까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고? =크림은 아마 시집까지 갈 생각 없었을걸. 타이밍을 봤겠지. 거기서 그러잖나. 결혼식을 올렸으니 진짜 부부가 됐다. 이보영씨 코디네이터가 결혼식 장면을 찍을 때 나한테 살짝 와서 아무도 안 물어봤던 질문을 하더라고. 감독님, 왜 결혼식 하객들이 박수를 안 쳐요? 그래서 너는 참 예리해서 내가 알려줄게. 여기가 결혼식장이 아니라 장례식장이야, 그랬지.

-케이와 크림이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더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에 의미를 많이 둔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집이 경기도에서 농사하던 집이라 밥에 민감하다. (웃음) 밥 먹었냐, 가 인사고, 밥 먹은 배가 왜 이래, 이게 인사다.

-주인공들이 라면을 좋아하던데 라면은 좋아하나. =여긴 내가 좋아하는 게 다 나왔다. 라면, 담배, 커피.

-제목도 직접 지은 건가. =제목은 회사에서. 내가 원래 지었던 제목은 ‘사랑에 빠진 미운 오리들’이다.

-극중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름 말인가? =그게 원래 제목이었는데 회의를 하던 중에 대표가 슬픔보다 더 슬픈, 뭐 그런 거 없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차라리 그걸로 하자. 이야기만 붙여서. 안 슬프면 나 바보 되는 건데 딱 오니까 간 거지.

-이모개 촬영감독과 조근현 미술감독이 합류했다. 화면이 인상적이던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작업했나. =그 영화 자체가 누가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이다. 미술까지는 모르겠는데, (이)모개랑은 누가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살렸으면 좋겠다고 의견 조율을 했다. 자칫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 모개가 현실감을 잡아줬다.

-권상우는 그전에 다른 영화의 출연을 번복하면서 말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캐스팅했나. =나는 캐스팅이 된 다음에 만났다.

-연출을 하기로 했으면 그전부터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시나리오를 썼을 때는 감히 내가 권상우를 캐스팅하자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잡고서 나를 기쁘게 해줬지. 권상우가 캐스팅될 것 같아, 어때? 고맙죠, 그랬다.

-이보영도 비슷한 케이스인가. =그렇다. 내가 주장한 건 정애연씨밖에 없다.

-이승철, 정준호, 남규리 등 얼굴 보면 알 만한 연예인들이 깜짝 출연했다. =제작사의 인맥 덕이다. 나는 그렇게만 주장했지. 이승철씨 역으로 진짜 가수가 나와야 한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이걸 배우가 해야지, 아님 화면이 튄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한 게 이건 진짜 같은 이야기가 돼야 해서.

-사랑, 연애, 이별, 그런 것들에 대한 시들을 주로 썼다. 첫 영화도 멜로인데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나. =관심이 많다기보다 내가 더 잘하는 거고. 내가 코미디를 쓰면 보지도 않더라고.

-사랑 이야기에 소질 있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솔직하거든. 왜? 돌려 말하는 남자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남자가 멋있지 않나. 나는 그렇더라. 솔직하게 대하면 여자들이 좋아한다.

-크림과 케이라니 이름부터 좀 민망하다 싶은 관객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견은 없었나. =많았지. 사실 이름이랑 직업을 못 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카페에서 대학 교수인 친구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친구가 크림을 따로 달라고 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교수님, 그러더라고. 어, 너 어떻게 지내. 저 엠넷 PD 됐잖아요, 그러면서 명함을 주더라고. 그 상황에서 크림 나왔습니다, 이러는데 사람 이름처럼 들리더라. 오케이, 여자 이름 크림. 남자 직업은 라디오 방송국 PD. 여자 직업은 작사가. 남자 이름은 뭐로 하지? 강철규, 내가 아는 싸이더스 PD 이름이다. 생각해보니 이름이 참 착하더라고. 성이 강이니까 케이로 해야겠다.

-1998년부터 영화 연출을 준비했다고 들었다. 자기가 직접 만들고 싶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그때 쓴 시나리오는 차승재 대표가 갖고 있다. 차승재 대표가 그걸 사서 연출을 하라 그랬는데 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하면 안되겠다 싶더라.

-그것도 멜로였나. =멜로였다.

-혹시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진 않았나. =안 배웠다.

-1995년 신씨네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때 제대를 했는데 민병천 감독이라고 알지? 그날 신철 사장도 만났던 것 같다. 당시에 민병천 감독이 준비하던 <나비>라는 시나리오를 썼고. 그게 잘 안돼 삼영필름으로 가서 또 쓰고. 딴 데 가서 또 쓰고. 2년이 지나더라고. 솔직히 나는 영화 연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열 받아서 시작했다가 거기 빠져버린 거야. 그러고 비디오가게에서 영화를 빌려보다가 5개월째 안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되게 찍는 것도 힘든 거구나.

-그 부분에서는 성공했다고 보는가. =안타깝긴 하지만 이게 내 손을 떠나갔을 때 작가가 가져야 할 마음상태가 있다고 본다. 그냥 애가 나오니까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거다.

-청결한 마음? =난 그걸 굉장히 중시한다. 탁한 마음 갖고 있으면 여지없이 날아온다.

-그럼 민병천 감독은 이미 알고 있었나. =그날 만났다.

-어떤 계기로 만났나. =그게 기억이 안 나. (웃음)

-책 출판하려고 출판사에서 잡일을 하기도 했다고 하던데. =7년 동안 습작을 했고, 네달 동안 잡부로 일했다. 원래 세달 하는 건데 한달 더 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먼저 도전하는 타입이 아닐까 싶던데.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무모한 사람이다. 옛날에는 몰랐다. 내가 무식하다는걸. 요즘에 나이가 드니까 나한테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는 여기 툭 나를 밀어놓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다. 울면서 배우는 스타일이다.

-뮤직비디오도 두편 연출했다고 들었다. =정말 잔인한 경험이었다. 처음 작품은 이요원씨랑 서태화씨가 주인공이었다. 노래는 모를 거다. 안 떠서. 나는 뭐 하여튼 잘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제작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흑백으로 만들어버린 거다. 성질이 나가지고. 그 다음번엔 내가 작사한 노래를 가지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거지. 댄스음악이었어. 그런데 월드컵이 터졌지. 사장됐어.

-요즘은 시 안 쓰나. =서른세살 때인가. 시를 쓰고 앉아 있더라고. 책 내려고. 슬펐지. 구라거든. 그 뒤에 안 썼다.

-책 내려고 시 쓰는 게 싫어서? =그거야말로 진짜 구라지. 다른 시인들이 나를 욕하는 게 그 사람들이 나를 모르기 때문이지, 시에 대한 내 자세는 훌륭하다고 본다.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는데? =그게 시냐. 나도 쓴다. 그리고 이단아지, 쉽게 말하면. 나쁜 놈이지. 영화판에서도 그럴걸? 난 이제 익숙해. 작사판에서도 그랬고.

-경희대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고 나오더라. =사격선수였다. 고2 때부터 한 거다. 대학 들어가서 중국 시합 갔다 와서 그만뒀지.

-사격을 시작한 계기는 뭔가. =너무너무 좋아서였지. 우리 학교에 사격부가 있었다. 고가의 운동이라서 참고 있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보호가 필요해서 사격부에 들어갔지. 총을 갖고 다니면 날 괴롭히지 못할 것 같아서. (웃음)

-혹시 누군가한테 찍혔나. (웃음) =농담이다, 농담. 총을 되게 좋아했다. 총이랑 말만 보면 가슴이 뛰어.

-의외로 남성적인 취향 아닌가. =난 완전 남자다. 그리고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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