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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저] 샴푸의 요정이 짜릿짜릿해요
2009-03-06

금태섭의 ‘미용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상담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겉보기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사는 신체 건강한 남성입니다. 오늘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제가 미용실에 갈 때마다 느끼는 쾌감이 너무 추한 것은 아닌지, 중년의 주책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미용실, 그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세계. 어려서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가보면 정말 별천지 같았습니다. 가운을 입고 머리에 이상한 걸 쓴 여자들이 여성지를 보면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는 곳. 가슴을 두근거리며 몰래 그 잡지를 훔쳐보다가 엄마가 파마 끝났다고 가자고 부르면 화들짝 놀라곤 했지요. 어쩌다보니 이제 남자들도 미용실에 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곳에 가면 어딘지 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미용실에 계신 분들은 쓰는 말부터 우리와는 다릅니다. 저 같으면 그냥 “머리 깎으러 오셨나요?” 할 텐데 그분들은 “커트 진행하실 건가요?”라고 합니다. 다 깎고 난 뒤에도 “머리 감겨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샴푸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겉옷을 걸어줄 때도 “옷 주세요”가 아니라 “탈의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듣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습니다. 머리 깎아주시는 선생님들이나 도와주시는 분들이나 뭔가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계신 것 같아요.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 게 틀림없습니다.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 중 최초로 남자의 성기가 화면에 꽉 차게 나온 영화 <크라잉 게임>. 그 성기의 주인공이자 여장한 게이로 나오는 배우의 극중 직업이 미용사였지요. 음,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어쨌건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미용실에서 ‘샴푸 도움’을 받는 건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말 구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얼마나 좋은가 하면 이 정도로 쾌감(?)을 느끼는 건 범죄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더구나 머리를 감을 때는 안경을 벗기 때문에 실제 용모에 관계없이 머리 감겨주는 분이 천사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 남자가 머리를 감겨줄 때가 있습니다. 이거 법으로 금지시켜야 합니다. 뼈빠지게 일하는 대한민국의 아저씨들이 한달에 한두번 경험하는 쾌락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이런 파렴치한 행위는 반인륜적인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엊그제 동네 미용실에 갔는데 남자가 머리를 감겨줬습니다. 아아, 어떻게 기른 머리인데. 언제 다시 머리 길러서 간단 말이냐….

선생님, 이게 잘못된 걸까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줄 때 남몰래 쾌감을 느끼는 것이 꼭 반성해야 할 일일까요? 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감아야 하는 걸까요? 제가 죄인일까요? 서초동에서 고민남 올림

금태섭 법무법인 지평지성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지은 책으로 <디케의 눈>이 있고, CBSFM <뉴스쇼 스페셜> 진행을 맡고 있다.

금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