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무서운 세상이다. 올해 초 공영방송 KBS의 멋진 장수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가 아무런 공지도 없이 폐지되는 것을 보면서도 섬뜩했다. 지난해 말인가, 이 프로그램에서 시골의사 박경철과 우석훈 교수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를 얘기하며 현 정부 경제정책을 마구 씹는 것을 보고 불안하긴 했는데(물론 그것 역시 실제보다는 엄청 편집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올해가 되자마자 폐지돼버린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건 EBS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한문페) 폐지 소식이다. 대신 무슨 외국어/처세 프로그램이 하나 더 신설된다고 하니 여기도 영어 저기도 영어, 이거 원 장기하가 조만간 싸구려 커피 대신 캐러멜 마키아로를 노래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교양 프로그램이 대신 들어설 수 있다고는 하나 현재로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더불어 같은 EBS의 <책으로 만나는 세상>도 폐지된다는데 위 두 프로그램은 홈페이지상에서 청취자에게 평점 만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EBS 교양의 간판 프로그램들을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내동댕이친 것이다.
실제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한문페’ 게시판에는 폐지 반대글들이 줄을 이었고, ‘한살모’라고 한문페 살리기 모임 카페도 만들어졌으며, 최근에는 한문페 살리기 1인 시위와 더불어 배우 송승환과 김갑수,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 시인 신현림, 진중권 교수 등이 한문페를 비롯한 문화 프로그램들의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 역시 한문페에서 영화 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서 추후 더이상 한영애 선생을 못 볼 것만 같은 불안감과 더불어 수익 감소 등의 아픔이 있다. (-_-)
한문페는 EBS에서 무려 7년이나 장수한 프로그램이다. 여타의 지상파 라디오 예능 프로그램들이 주로 영화와 음악에만 집중한다면 한문페는 그 흔한 두 가지 말고도 문학, 연극, 공연, 전시 등도 폭넓게 아우르는 말 그대로의 모범적 문화 프로그램이다. 무늬만 문화 프로그램을 내세우는 다른 프로그램들과는 퀄리티가 달랐다. 지난해 말에는 한영애씨가 쟁쟁한 다른 지상파 경쟁자들을 제치고 ‘한국방송대상 진행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 프로그램의 폐지는 한국방송대상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간판’ 프로그램을 별 논의없이 폐지하는 윗사람들의 용기는 과연 어디서 생기는 걸까. EBS와 KBS는 정말 조금씩 공영방송을 넘어 국영방송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불황이라지만 시청률과 수익성이라는 견고한 단어 앞에 교양과 문화는 이처럼 맥없이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이거 성질 뻗쳐서 정말 <아내의 유혹>이나 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