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의 부품으로서의 내가 모범생이 아니었던 탓에 치욕과 모멸을 수시로 감당해야 했었다면, 그 강고해 보이던 체제가 알고 보니 워쇼스키 형제가 마치 우주의 계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적확히 묘사한 가상현실, 매트릭스에 다름 아닌 것을 깨달은 것도, 모범생이 아니었던 덕분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웬만큼 모범생이면 부조리한 와중에서도 대충은 꿰어맞추면서 살아갈 수 있다. 내게는 그 능력이 없었다. 나는 늘 돌출했고, 손가락질당했으며, 그럼으로써 체제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남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 대가로 나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이라는 영양소를 거의 섭취하지 못한 채 나날이 존재의 낭떠러지로 몰려갔다. 그러니까 네오의 몸속에 내장된 칩은 트리니티가 꺼내주었지만, 내 몸속의 칩은 내 살이 토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을라나.
어쨌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해되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 내가 누구이고,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살아가는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이고,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의 완벽한 해방감이 주어진 것은, “내가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진정한 위기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의 위기를 외면하고 은폐하고 무마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해왔지만, 그것은 오로지 거미줄같이 나를 옭아맨 의무와 책임의 사슬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붐~~~, 더이상 그런 토 나오는 짓을 지탱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준비가 된 순간, 밧줄을 놓아버리는 게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낫다는 사실이 확연해지는 순간.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 최면에서 깨어났다고 해야 할까. 위기 앞에서 눈을 부릅뜬 순간, 에라 죽기밖에 더 하겠냐 하면서, 두려움없이 위기를 정면으로 바라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뭔 콩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고 평생 들어온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문구가 어머나, 이렇게 쉬운 말이었구나, 즉각 접수되었다. 어쩔 수 있는 수천만 가지 방법이 있는데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이 시대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지독한 최면, 영혼을 마취시키는 어떤 최면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핵심정리를 요구하지 마시라. 공짜는 없는 법. 지금 다 말해버리고 나면 이 연재 끝내야 하잖아).
여담인데, 구르지예프는 제자들에게 늘 비싼 수업료를 받았다. 이 사실에 의문을 품은 한 지식인이 “진리를 가르치는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 사람들이 공짜로 얻은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였다나 뭐라나.
<매트릭스>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트리니티를 짝사랑하던 모피어스의 한 대원이 트리니티가 네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배신을 때린다. 네오의 현 위치를 알리는 밀고자가 된 것이다.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스미스 요원과 스테이크 접시를 앞에 놓고 마주한 그 배신자의 대사. 스테이크 한점을 입에 넣으며, “난 이게 가짜인 줄 알고 있어. 하지만 맛있단 말이야”. 희대의 명장면, 명대사 속에 요거 빠지면 안된다. 워쇼스키 형제의 감수성 안테나가 우주의 메시지를 포착했다는 증거 중의 하나니까.
가짜인 줄 알고 있다. 하지만 맛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구르지예프의 묘사처럼 대다수 현대인들을 종소리(돈!!!!)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로 만드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반응하는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자신을 길들이는 당근을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