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그것도 모자라 급기야는 엄마에게 현장에서 체포(?)될 때까지 온몸이 땀에 젖으며 뛰어놀던 스펙터클한 놀이터. 바로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골목길이다. 특별히 놀 것이 없던 시절 밥만 먹으면 동네 어귀로 모여 총싸움, 칼싸움, 숨바꼭질 등의 놀이로 하루해가 짧을 지경이었는데, 요즘은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아이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이제 동네 보습학원을 가야 하지 않을까?
재개발로 사라지는 오래된 흔적들
어쩌면 골목길의 아이들보다도 골목길 자체를 찾기 어려운 시대일 것이다. 영화는 여러 가지 과거의 모습을 필요로 하지만,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 개발바람은 산동네 골목길을 아파트 단지로 채워넣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골목길을 어렵사리 찾게 될 때면 일부러 더 많은 사진을 찍어놓는다. 위 사진은 마치 1970~80년대 모습처럼 보이지만 3년 전 하월곡동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들이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의 사회적 척도와는 상관없이 너무도 해맑게 느껴진다. 사진에서 특히 주의 깊게 봐야 할 것들이 있는데, 동네 언덕 너머로 보이는 타워 크레인들이다. 재개발의 폭풍이 이 마을의 아이들에게까지 다가온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한다면 이처럼 대비되는 요소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골목길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시나리오에는 ‘골목길’이란 한마디 단어로 지시될지라도 전체적인 이야기와 콘티에 걸맞은 장소를 찾으려고 하면 선택의 수는 더욱 적어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고니는 좁다란 골목길을 지나 계단을 올라야 볼 수 있는 작은 가게에 들러 라면을 하나 샀다’라는 지문이 있다면 이 모든 여건을 가진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하는 작업은 ‘좁은 골목이 있을 만한 동네는 어디일까?’라는 고민이다. 몇 가지 대안들을 만들어내고 그 동네를 샅샅이 뒤지며 시나리오에 맞는 계단과 작은 가게들을 찾아내다 보면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작은 가게’가 나올 때도 있다. 정말 신기한 일들이 벌어질 때가 가장 신이 난다. 그럼에도 ‘끝내’ 꼭 맞는 장소가 나오지 않으면 ‘등장인물의 동선’이 바뀌거나 편집을 통해 비슷한 다른 장소와 연결함으로써 난관을 극복할 때도 있다.
또 이왕이면 전체적인 촬영이 이루어지는 지역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민도 있다. 만약 한 영화가 부산에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한다면 이곳을 주 촬영지로 두고 인근 지역을 뒤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의 제작견적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동거리가 멀다면 그만큼 이동에 대한 시간적, 물적 부담감이 따르기 때문이다. 촬영이 시작되면 시간은 곧 돈과 직결된다. 한 장소에서 여러 신을 소화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는 전체 스탭들도 좋아하겠지만 특히 조명팀같이 많은 장비를 꾸려야 하는 스탭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동네 내버려둬라” 항의 받기도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장소가 내 눈에는 그럴싸 보일지라도 촬영을 진행할 수 없는 곳이라면 포기해야만 한다.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언덕 동네 중 하나인 서울 종로구 이화동은 다른 산동네들이 모두 재개발되면서 희소가치를 인정받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영화, CF 등 많은 촬영팀들이 이곳에서 촬영을 하게 됐는데, 정작 이곳에 사는 분들은 그런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창 촬영을 하다보면 ‘우리 동네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고함을 치는 노인분들도 더러 보았다. 이런 경우는 결과적으로 단순하게 ‘그림’만 보고 헌팅을 하는 사례다. 그곳의 여러 목소리들을 들어보고 만약에 행정적인 처리를 해야 하는 곳이라면 구청이나 경찰서에 공문을 넣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 자칫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많은 요건들 중 단지 몇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고려되어야 할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 많던 문제들도 하나둘 풀어가면 어느새 로케이션 매니저의 일 바구니는 가벼워진다. 현실 안에서 비현실을 발견해내는 능력과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에 적용하는 유연함을 갖고 장소를 찾아 헤매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로케이션 매니저가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골목과 언덕이 사라져 가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보자. 계단을 오르고 골목을 지나, 담벼락을 끼고 돌면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눈빛들을 만나게 된다. 노인과 아이들, 동물들의 호기심어린 눈빛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고 용기있게 다가간다면 우리는 그 시대를 기록하고 묻혀진 이야기들을 파헤쳐 내는 ‘도굴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