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은 마을에 상상하기 좋아하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을과 집을 행성과 밀림으로 상상했으며, 잠들기 전에는 시계와 로켓, 코끼리 등이 새겨진 자기 방의 벽지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맘껏 뛰어노는 꿈을 꿨다. 머리가 조금 커진 뒤에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뒤러의 그림을 습관적으로 탐닉했다. 그들의 모범적인 그림이 지겨워질 때면 마그리트나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의 익살맞은 작품을 보며 머리를 식혔다. 예술적 자양분을 듬뿍 먹고 자란 소년의 유년 시절은 여느 화가 지망생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른이 된 그는 화가가 되지 않았다. 그 선택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
물론 소년은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순간을 포착한 그림보다 그 작품과 연결되는 앞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림도, 이야기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그림책 제작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단 한줄의 텍스트도 포함되지 않은, 그림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 첫 그림책인 <자유 낙하>를 내기까지 10년이 걸렸지만 물리적인 시간은 그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첫 책이 출간되자 한편의 영화를 떠올릴 정도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와 몽환적인 그림체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림책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칼데콧상의 심사위원들은 그때부터 새 작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를 불러들였다. 남자는 칼데콧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3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이 동화 같은 성공담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이 ‘제1회 CJ 그림책 축제’의 초청작으로 선정돼 성곡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칼데콧상 수상작인 <이상한 화요일> <시간 상자> 등 원화 50점이 포함되어 있다. 두꺼비, 뭉게구름 등 작가의 유년 시절에서 툭 튀어나온 과거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테고,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는 위즈너의 원화 이미지를 보며 어린 시절의 그가 그랬듯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수많은 버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 기쁘다”는 위즈너의 바람은 그렇게 실현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