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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보이는 세상
2001-11-22

<서브 커맨드>

자동차나 비행기, 오토바이와는 달리 잠수함 시뮬레이션 게임은 흔하게 나오는 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한번 잠수함 시뮬레이션에 맛들이면 빠져나올 수가 없다. 다른 게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 있다.

잠수함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잠망경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물론 잠수함 시뮬 게임에서도 잠망경은 극히 제한적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 잠망경을 쓰려면 일정 깊이 이상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대부분의 게임 진행은 훨씬 더 아래쪽에서 이루어진다. 섣불리 잠망경을 올렸다가는 물이 들어온다는 부하들의 비명을 듣게 될 뿐이다. 게임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물 속을 유유히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3D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 설명서에 대문짝만하게 써 있다. “3D 화면은 게임의 재미를 위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사실적인 게임을 위해선 끄고 플레이해라.”

시키는 대로 3D 화면을 끄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검고 차가운 물 속에서 시각을 봉쇄당한다. 대신 주어지는 게 ‘소리’다. 주위 소리를 체크해서 ‘폭포수 디스플레이’라고 불리는 화면에 표시한다. 표시라고 해봤자 배가 직접 나오는 건 아니고, 소리 크기에 따라 막대기로 나타날 뿐이다. 바닷속에는 많은 소리가 있고, 이 막대기들 중 상당수가 허수다. 실제 어떤 물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리저리 잠수함 방향을 틀어보며 여러 번 반복해서 측정해야 한다. 그 다음 속도를 측정하고, 소리의 반사를 체크해본다. 운이 나쁘면 이 과정에서 적이 우리 쪽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얻어낸 정보를 전부 종합해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다보면 그 물체의 범위가 좁혀진다. 만일 선박으로 판명되었다면, 유조선인지 상선인지, 아니면 전투함인지 판단해야 한다. 잠수함도 종류가 여럿이다. 최신형 잠수함에 타고 있다면 비교적 용이한 작업이지만, 예를 들어 러시아 구형 잠수함이라면 판단에 도움이 될 기기들이 많이 부족하다. 어쨌거나 최종 판단을 내려, 상선인 것 같으면 그냥 보내주고 적의 전투함이라면 전투 준비에 들어간다.

아무리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어도 그게 꼭 맞으란 법은 없다. 만일 틀렸다면, 상선인 줄 알았는데 실은 상선으로 위장한 전투함이였다면? 뒤통수를 맞아 침몰할지 모른다. 적선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최신 엔진을 장착한 여객선이었다면?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인데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자료들이 너무 모자란다. 이미 결정을 내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전까지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시각에 많이 의존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잠수함 시뮬레이션이 독특한 경험인 건, 시각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판단’과 이에 대한 ‘믿음’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많은 싸움을 겪으며 경험이 쌓이다보면 판단능력, 그리고 이에 대한 믿음 역시 점점 커진다. 하지만 자신감이 늘다보면 반대로 판단력이 허술해지기도 한다. 쉽게 내린 결정이 가져온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잠수함에서 내려 탁 트인 세상으로 나오면 안심이 된다. 이제는 마음놓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안심하면 할수록 판단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건, 어둡고 캄캄한 바닷속뿐 아니라 뻔히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도 여전히 진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