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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2001-11-22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가을 소나타>

Autumn Sonata 1977년, 감독 잉마르 베리만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EBS> 11월24일(토) 밤 10시

한 모녀가 피아노 앞에 다정히 앉아 있다. 딸은 쇼팽의 피아노곡을 치고 어머니는 조용히 그녀의 연주를 감상한다. 그런데 딸은 어머니의 살가운 반응이 익숙지 않다. “뭔가 평가를 해주면 좋겠어요”라며 머뭇거리며 말한다. 처음엔 거절하던 어머니는 딸과 자리를 바꾼 뒤 피아노를 연주한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곱고 영롱하다. 프로의 솜씨다. “쇼팽의 곡은 열정과 절제, 그리고 남성미가 함께 들어 있는 거다.” 어머니 연주를 듣는 딸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녀에 대한 미움과 경외감, 그리고 동경의 마음이 얽히고 설켜 있는 것.<가을 소나타>의 이 장면은 영화 속 모녀관계를 간략하게 해설한다. 배우들이 자리만 옮긴 채 같은 위치에서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이 장면은 몇년 만에 만난 모녀가 서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들춰낸다. <가을 소나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음’에 관한 영화다.

샬롯과 에바 모녀는 7년 만에 재회한다. 유명 피아니스트인 샬롯은 동료 음악가이자 연인인 레오나르도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다. 샬롯은 둘째딸인 헬레나를 에바에게 맡겨놓은 상태. 장애자인 헬레나는 말을 거의 할 수 없는데, 에바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샬롯은 한밤중에 깬 에바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했는지,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 성장했는지 알게 된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후기작들은 여성영화적인 취향을 지닌다. <외침과 속삭임>의 자매들, <가을 소나타>의 모녀 등 1970년대 이후 베리만 감독은 주로 여성들의 이야기에 천착한 것. 베리만 감독은 당시 “난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 대해 끊임없는 매혹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가을 소나타>는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실내극 형식의 작업이다. 영화에서 샬롯과 에바 모녀는 에바의 집에서 대화하며 영화의 장소이동은 ‘과거’에 관한 회상에서만 가능하다. 그외엔 인물들이 실내에 붙박혀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리브 울만의 연기는 서늘한 감을 준다. 처음에 다정해보이던 두 사람은 딸이 예술가인 어머니의 이기적인 면을 하나씩 회상하면서 관계가 붕괴한다. 처음에 딸은 어머니 눈치만 살피지만 “당신은 살아 있는 모든 걸 숨막히게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항변한 뒤 주눅들었던 그녀 무의식이 차츰 살아 꿈틀거린다. 고상한 피아니스트로만 보이는 샬롯 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화는 그녀 유작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는 위선적 캐릭터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기한다. <가을 소나타>의 샬롯이라는 캐릭터는 아마도, 가장 차갑고 모성이 전무한 어머니상으로 기억될 만하다. 영화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 특유의 비관론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내가 행복했다고 여기던 시절이 내 곁의 타인에겐 아프고 고통스런 시간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실존’문제가 <가을 소나타>에 실려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