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미는 정직하게 노동하는 작가다. 정직한 노동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지와 비단, 모시를 손질해 종이를 만드려면, 자연의 재료로 염료를 만들어 종이에 색을 입히려면, 콩을 여러 날 불려 갈아 만든 즙으로 종이를 닦고 지우고 훔쳐내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고된 작업 끝에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은은히 품은 빛, 숨결같이 고운 표피, 체온을 받아주는 푸근함, 하지만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강인함.” 자신이 만든 종이를 보며 정종미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한 한국의 여성들을 떠올렸다. 여자와 한지는 그렇게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역사 속의 종이부인>은 보통 여자보다 조금은 특별한 11명의 여성을 소개한다. 유화부인, 선덕여왕,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등이 그들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이들을 기억하고 경외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종이로 만든 여인들 곁에 ‘날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사임당 그림 곁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 유화부인 그림 옆에는 고구려 벽화의 인물들이 곱게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