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써달라고 난리다. 젝일슨. 자신의 평생이 걸린 어떤 이야기를 하는데, 편집장 생각은 오로지 부수확장, 광고수입 증대를 통한 편집장 입지구축 내지는 잡지쟁이로서의 명성 또는 자존심 유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만약 내 글이 진실이라면, 그 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과연 관심이나 있는 걸까? 내 글이 진실이라면,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고 올인하며 사는 이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생각해본 적이나 있을까?
그저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나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류의 재미를 추구하는, 글 쓰는 사람을 기껏 제보자 취급하는 편집장에게 꿀밤 한대 먹이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씨네21>이 망해도 인류 복지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만약 <씨네21>이 망한다면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재미있는 뉴스 중 하나일 것이며, 나 같은 필자를 끌어들여 <씨네21>을 망하게 한 죄로 별로 재미있지도 루크러티브하지도 않은 지금의 자리에서 그가 쫓겨난다면, 스트레스 과다섭취증으로 제명을 시시각각 단축하는 그의 우중충한 삶이 뜻밖에 컬러풀하고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한 파노라마 대서사로 바뀔 거라고 혼자 구시렁거려본다. 지금 그에게 절대적으로 모자란 ‘자유시간’이라는 자원이, 달마다 통장에 찍히는 몇 자리 안되는 숫자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요즘 내가 하는 게임의 이벤트 기간이라 열 손가락이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을 이유가 충분하긴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시간을 내어 그의 꿀꿀한 독촉전화를 받아주노라면, 문득 그가 진짜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그 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을 이루고 나면 그는 니르바나(열반)를 느낄 것인가, 물어본다(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물론).
말이 나온 김에, 모파상의 <진주목걸이>는 허영심에 찬 어느 어리석은 여인에 대해 다 같이 혀를 차주자는 뜻에서 씌어지거나 읽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였고, 당대의 인류에 대한 진단이었고, 현 인류에 대한 예언이었다. 가짜의 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가련한 중생이 되지 않으려면, 가끔 자신이 ‘오늘’을 희생해가며 추구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못 이해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문학작품, 롱펠로의 <인생예찬>이라는 시를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삶에 대한 모호한 예찬이 아니라 ‘살아 있으라’고 권하는 글이다. 영혼이여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깨어서 ‘오늘을 살아 있으라’고 촉구하는 시다. 아무리 장밋빛으로 보여도, 미래는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시간나면 다시 한번 찾아서, 곰곰이 되새기며 읽어보면 건강에 좋다. 김수현 드라마 <목욕탕집 사람들>에서 윤여정이 그랬듯이, 달달 외워두면 치매예방에 아주 좋다.
원래는 오늘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쓸 계획이었는데, 편집장이 먼저 주문을 하는 바람에,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딴소리를 하고 말았다. 고분고분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내가 겪어서 알고 있는 진실만을,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순서대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보따리를 장롱 속에 바리바리 숨겨둔 외할머니 취급은 하시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