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플레저? 나의 부끄럽고 은밀한 즐거움? 그런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음… 말하지 못하겠다. 너무 부끄럽고 은밀하니까. 또 곰곰이 생각해보자.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걸 내가 아는 사람이 읽는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아?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하지만 너무 유치해서 죽어도 말하지 못하겠다.
죽어도 말하지 못할 나의 진정한 길티플레저는 어쩔 수 없이 제외해두고 말할 수 있는 나의 길티플레저는 뭐가 있을까? 조금은 공개하기 창피한 나만의 즐거움은? 버거킹 와퍼? 12개의 칸을 다 채운 커피 빈 쿠폰들? 다 먹고 나면 후회되는 외대 앞 분식집의 매운 튀김무침? 베를린에서 사서 그곳에서만 쓰고 다닌 중절모? 후루야 우사마루의 <최강여고생 마이>? 자정 넘은 이 시각 내 속을 깎아내리고 있는 커피 한잔? 스폰지밥? 사람에 대한 섣부른 선입견에 매달리게 한 점성학 책자? 몇 가지 사행성 오락들? 미용실 가면 눈이 가는, 여성 잡지에 실려 있는 섹스 칼럼들? 1월 <레이디경향>의 섹스 칼럼엔 이런 제목도 있다. ‘시부모와 동거하는 부부의 섹스 노하우.’
내가 가진 길티플레저 중 몇개는 조금은 욕망과 닮은 것 같다. 작은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조금씩 실현해보는 욕망이다. 이미 즐거움이 있으니 내가 가진 욕망이다. 톨스토이 달력 7월31일자에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욕망이란 처음에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다가 손님이 되고, 어느새 마음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내가 즐기는 작은 욕망들이 역습해올까?. 내가 즐기는 어떠한 욕망은 소소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나에게 타격을 줄 잠재력이 있다. 내 책상 위의 톨스토이 달력은 나의 그러한 욕망들에 가끔 가책을 안겨준다. 그렇게 나의 작은 욕망들을 진정한 길티플레저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건실하고 종교적인 격언들로 이루어진 톨스토이 365달력은 어느 때부터인가 내 책상 위에서 나의 일상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 때로는 죄책감을, 때로는 자기반성을, 때로는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 커다란 거짓말을 눈 깜짝하지 않고 한 어느 날 밤, 잠들기 전 책상 위의 격언을 본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혼만이 모든 것을 본다.’(톨스토이 달력 11월12일) 뭐 이런 식으로 느끼고 싶지 않은 죄책감을 안겨 괴롭게도 하고. 무위도식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이상한 격언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톨스토이 달력 10월23일)
나의 상황과 내 멋대로의 해석 덕분에 교묘하게 톨스토이의 달력에 지배를 받게 되는 나날이 된 것이다. 가책을 주는 톨스토이 도덕교과서는 그날그날의 지침서가 되기도 하고 어느 때부터 하루 운세를 점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톨스토이 달력 자체가 나의 훌륭한 길티플레저가 된 것이다.
1월14일 오늘의 격언은 이렇다.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을 좋은 일에 써야 진정한 자선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지배를 받는 톨스토이 달력이지만, 오늘처럼 솔직히 뭔 소린가 싶을 때도 있다.
김종관 영화감독. 2004년 배우 정유미와 함께 작업한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독립영화계의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헤이 톰> <누구나 외로운 계절> <메모리즈> 등 꾸준히 감수성 충만한 작품을 만들고 있으며, 2008년에는 자신의 단편영화 11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연인들>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