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잇따라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당시에도 그랬고, 이 연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그랬지만, 나는 이 모든 얼토당토않게 들리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정색하고 공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믿지 않을 걸 알고 있었고, 믿게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신 미약한 신도감을 고르는 사이비교주라면 몰라도 세상에 알려지면 인생 고달파지기 딱 알맞은 이야기들 아닌가.
예전에는 살짝 맛이 간 정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친년일세 그려, 소리가 서울 무슨 구 무슨 동 어느 아파트 몇동 몇호에서 들려올지 뻔히 아는 형편에 말이다. 편집장이 원고료로 주겠다고 약속한 맥주 세 박스, 담배 한 보루, 게임계정 다섯개는 어느 새로운 일터에 가서 이틀만 재미있게 품 팔면 간단하게 손에 들어오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로커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로커 바깥의 윌 스미스나 토미 리 존스가 아무리 외쳐본들 웅웅대는 소리로밖에 더 들리겠는가.
게임할 시간도 모자라는 판에 본전도 못 찾을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쓸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편집장 고경태씨가 몇년 만에 연락을 취해왔을 때, (고씨 자신은 본인의 의지로 내게 연락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무 걱정없이, 새처럼 자유롭게, 누구의 평가나 시선에도 갇히지 않고, 미안할 정도로 재미있게 살게 된 과정을 몇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몇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그 몇 사람의 생이 ‘워리’ 없는 ‘해피’한 것으로 바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몇 사람’이 아닌 분들은 이 무슨 괴발개발이냐고 아우성치시지 말고, 조용히 구독잡지를 바꾸시라. 잡지부수가 떨어져서 결국 폐간에 이르러야 독자도 돈주고 산 잡지 아까워서 억지로 읽는 고역을 면하고, 편집장을 비롯한 제작진들도 크리스마스와 설 연휴를 책먼지 휘날리는 사무실에 감금 당한 채 늙어가는 대신 설화 눈부신 겨울산에서 청춘답게 뒹굴 수 있게 되리라. 그리고 고작 일주일이면 ‘지난 것’ 취급받는 잡지가 되기 위해 잘려나가는 나무들의 숫자도 줄어들게 되리라.
돌아가서, 문자 그대로 사람들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되자,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갔다(그전에도 그랬다고요? 쉿!). ‘사악한’, ‘가증스러운’ 따위의 평소에 전혀 쓰지 않던 수사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루쉰이 <광인일기>에서 살 떨리게 묘사한 대로 그들 중 99.78%는 식인종이었다.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어린이들이 있는가. 어린이들을 구하라.” 아마 그 소설은 이런 구절로 끝났던 것 같다.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마셔야만 식인종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잡아먹고 산다. 그들의 입에는 보이지 않는 피가 묻어 있고, 그들의 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피가 철철 흐른다. 제임스 레드필드가 그의 연작소설들에서 그래픽하게 묘사한 ‘기’의 먹고 먹히기 장면을 연상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