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그 한마디를 건네면서도 여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구태여 찾아오긴 했지만 수녀복 입은 모습으로 마주할 용기는 아무래도 없다는 듯. 빛속으로 끌려나온 남자는 한사코 발끝만 바라보는 중이다. 두손을 옥죄는 수갑을 버릇처럼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기도원에 갇혀 지내기에 여자의 심장은 너무 담대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기에 남자의 영혼은 아직 자유롭다. 그 여자의 이름은 채희주, 남자의 이름은 공상두다. 영화 <약속>의 그 여자, 그 남자가 수녀로, 또 사형수로 무대에 올랐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에야 영화 버전이 더 유명하다마는 전도연·박신양 주연의 <약속>은 본디 이만희 작가가 쓴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 <약속>을 기준으로 삼자면 공상두가 야쿠자에게 빌붙은 조폭 두목들을 처참하게 베어버린 다음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영화에서와 달리 이 불운한 커플은, 그러나 같은 이불 아래 다정하게 몸을 누인 적도 없다. 심복이었던 엄기탁이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지도 2년째. 채희주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영해 언니가 폐암으로 눈감을 동안 공상두는 그녀를 홀로 남겨뒀다. 그 흔한 안부인사조차 없이. 한때 눈이 멀 만큼 심하게 앓으면서도. <약속>의 팬이라면 공감할 부분도 많다. 양아치와 건달의 차이를 설파하는 그 유명한 장면에선 어김없이 웃음이 터지고, 채희주의 전설적인(?) 대사 “다른 여자 만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야. 네 마음에서 나를 제쳐놓는 것도 내겐 배신이야”라는 몇 마디는 눈물로 방울진다. 똑 부러지는 말투는 배우가 바뀌어도 여전하고, 공상두가 술에 취해 주절대던 거지론은 채희주의 목소리로 다시 구현된다.
<약속>이 극장에 걸린 게 1998년. 그 사이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을까. 평생의 이별을 앞두고도 머뭇거리는 남녀가 애틋하긴 하다만 이들의 사랑을 구식이라 몰아붙인들 변명할 길 없어 보인다. 애당초 조폭 출신 노신사에게 전해 들은 사연을 토대로 한, 원숙한 시선으로 과거를 껴안는 작품이기에 행간에 들어찬 침묵이 무겁게 느껴질 만도 하다. 물론 참을성없는 이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있다. 채희주가 공상두에게 “돌아서서 떠나라”고 할 때,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은 불행한 여자가 평생 후회할 그 말을 꺼내고야 말 때, 우리 마음도 덩달아 나락으로 치닫는다. 어느덧 마흔에 접어든 조폭 두목 공상두 역에 유오성이, 마지막까지도 당찬 여의사 채희주 역에 진경·송선미가 캐스팅됐다. <내일은 천국에서> 등의 안경모 연출가가 지휘한다. 여자친구, 어머니와 함께 관람할 생각이라면 티슈 정도는 알아서 마련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