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랑이 나치스 치하 독일영화계의 양심으로 꼽힌다면, 일제시대 조선영화계에는 윤봉춘(1902∼75)이 있었다. 1940년에 ‘조선영화령’이 발표된 뒤 대다수의 영화인들은 하나의 국가기구에 묶여 노골적인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만들어야 했는데, 낙향하여 농촌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세운 윤봉춘을 비롯한 극소수의 영화인들만이 완벽하게 눈부신 해방을 맞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봉춘은 함북 회령 만세운동과 독립군 활동으로 죽마고우인 나운규와 함께 1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소해서 고향에 머무르던 그는 먼저 영화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나운규의 권유에 따라 1927년 <들쥐>에 출연함으로써 영화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윤봉춘의 본령은 감독으로서, 1930년 <도적놈>을 시작으로 <큰무덤>(1931), <도생록>(1938), <신개지>(1942) 등을 연출했다.
작품을 통해서나 삶을 통해서나 일관되게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 즉각 영화활동을 재개하여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등 항일 투사를 소재로 한 이른바 ‘광복영화’들을 연출했다. 전쟁 뒤에는 <고향의 노래>(1954), <다정도 병이련가>(1957), <영원한 내사랑>(1958), <인생대학 일년생>(1959)과 같은 동시대적 감수성의 영화를 만드는 한편, 사극 분야에서 여전히 <처녀별>(1956), <논개>(1956), <한말풍운>(1959), <민충정공>(1959), <황진이의 일생>(1961) 등 민족의식문제를 화두로 끌어갔다.
윤봉춘은 이 인터뷰 말미에서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가혹했던 시대를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작품과 삶의 궤적을 이어온 그의 말은 얼핏 단순하게 들리면서도 초기 영화사의 근본적인 쟁점을 건드린다.
봄에 만났으니 ‘봉춘(逢春)’
엄격한 의미에서 난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서울 와서 한 사오십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지금 호적에는 서울이 본적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회령이구요, 또 회령도 원고향은 아닙니다. 제가 난 고향은 함남 정평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서 돈 맨드는 게 직업이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대장간 같은 데서 엽전 만드는 공장에 직공으로 있었죠. 그때 동학란이 터져서 거기 가담을 했거든요. 처음에는 동학군이 승세하다가 전봉준이 사형당하면서 기세가 확 뒤바뀌었죠.
고향에 있을 수가 없어서 원산으로 갔는데 원래 부인하고 생이별하고 함경도로 올라가다가 도중에 어떤 처녀를 만난 것이 지금 우리 어머니입니다. 그러니까 뭐 살림도 엉망이고, 무슨 수입이 있습니까? 방은 단칸방이고. 우리 어머니가 새벽에 애가 나올 기미가 생기니까 고 아래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갈려고 하는데 내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천하에 혼자서 나를 낳았죠.
아버지가 ‘이놈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어야 되냐?’ 굉장히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질 않아서 문을 탁 열고 보니까 산에 꽃이 많은 거라. 아하! 봄에 만났으니까 이놈을 봉춘(逢春)이라고 하자. 그래서 봉춘이가 된 겁니다.
정평에서 나를 낳아가지고 함흥 서호라는 쬐끄만한 포구에서 내가 다섯살까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나라에선 살 수 없으니까 북간도를 들어가자, 해서 내외간이 북으로 향해 들어가다가 회령까지 들어갔죠. 거기 두만강가에 가서 북간도를 건너다보면 컴컴합니다. 지대가 이상스럽습니다. 강 하나 사이에 놓고 그렇게 산천이 다릅니다. 우뚝우뚝 높은 시커먼 산이 쌓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걸 보시고 낙심을 했습니다. 사는 것도 좋지만은 어떻게 우리가 고향을 버리고 저런 데 들어가서 살 수가 있느냐. 먹으나 굶으나, 또 우리가 동학군으로 잽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회령에서 머물러 있자. 그래서 회령 백성이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아주 참 대단했습니다. 그래 날 어디로 보냈는고 하니 서당에다 보냈어요. 일곱살 때. 서당에 댕길 때는 머리를 길러서 댕기 땋았습니다. 거기서 천자책 떼고. 제가 여덟살 되는 해에, 하루는 아버지가 “너 오늘 서당 가지 말아라”, 그래 어디로 가는고 하니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회령 와서 정착하면서부터 교회에 다 나가셨는데, 나를 그 학교에 입학을 시킬려구 주일날 교회를 데리고 갔단 말예요. 들어가니까 지금은 남녀가 다 한데 앉아서 예배를 보지만 그때는 사이를 막았습니다. 두꺼운 판자로 아주 꼭대기까지 막고 이쪽엔 남반, 이쪽엔 여반. 이렇게 가려놨습니다. 그런데 곁에 애들이 자꾸 저희끼리 옆으로 쿡쿡 찌르고 웃어요. 나는 화가 몹시 났는데 선생님이 데리고 나가더니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아줘요. 머리를 길러가지고 댕기를 붙이고 앉았으니까 구경거리였단 말예요.
반항정신 체화하며 성장
이 교회가 장로교이고, 학교 이름이 사립신흥보통학교입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개 교회 사람들이 사상이 심하죠. 3·1운동의 선구자들이 다 종교인 아닙니까? 천도교니, 불교니, 예수교니. 회령에서도 교인들의 사상이 심했습니다.
내가 나중에 명동중학교에 다녔는데, 회령의 사립신흥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쳐준 체육 선생님 한분이 박용운이라고, 이 박용운 선생도 간도 명동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간도 명동중학교가 예수계 학교인데, 그 학교가 독립군 양성소입니다. 나중에 용정(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 필자)에 있는 영사관에서 와서 학교를 불태우고 선생 잡아가고 학생들 모두다 잡아가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가 사립학교고 그러니까 학생들이 적고, 경영하는 데도 대단히 곤란을 받았고. 그러니까 선생들이 다 희생적으로 와서 가르쳐주었고. 경절날 같은 때는 일본기를 띄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안 띄웁니다. 선생님이 일본기에 코를 풀어서 그냥 방에다 던져두고 맙니다. 그때 헌병이나 순사가 와서 기를 왜 안 달았냐고 그러면 그때는 학생들보고 달라고 시킵니다. 지나가면 또 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직접 우리 눈으로 보고 자랐고. 또 체조시간에는요, 전부 웃통을 다 벗깁니다. 회령 저 뒤에 높은 산이 있습니다. 거저 그 산으로 학생들을 몰고 올라갑니다. 몰고 올라가서 그냥 달립니다. 신체 단련을 그렇게 시키고. 구구절절들이 말마다 “우리가 때가 오면 우리가 총 메고 일어서야 한다”고. 아주 애국지사입니다. 그분이 나중에는 목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선생 밑에서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예수교 사상이 역시 반항정신이고, 또 우리 아버지가 동학군으로 그게 반항정신 아닙니까? 또 우리 어머니가 무식하지만 옛날 얘기를 많이 알아요. 임진왜란 때 장수 얘기를 들어가면서 자랐기 때문에 역시 커서도 “사상이 뭐냐?”고 하면 민족주의라고 그러지 다른 것은 말할 수도 없게 되고. 생리적으로 그렇게 조직이 되었습니다.
고등과 1학년 때 나운규와 한 반
운규하고 나하고는 같은 회령 사람이면서도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때 학교 제도가 보통과 2년, 고등과 2년인데, 소학교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이 될 때 나운규를 만났습니다. 나운규는 보통학교를 졸업맞고 우리 학교(명동중학교- 필자)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고등과 1학년 때부터 한반이 되어서 같이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되었죠. 2년 동안 공부를 하는데, 내내 우리집에서 살았습니다. 자기 집은 별로 안 갔습니다. 친구 좋으니까 늘 와서 있고. 또 우리 어머니가 내 친구를 대단히 좋아하고, 나도 또 친구를 좋아하고. 그래서 내내 우리집에서 같이 자랐죠. 이 명동중학교는 김약연(윤동주의 외삼촌- 필자)이가 교장입니다. 설립자인데, 아주 열혈 독립사신이죠. 있는 재산을 털어가지고 명동중학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간도에 중학으로는 처음입니다. 그 후에 중학이 한 20개가 되었지만. 독립만세 이전부터 쭉 있어가지고, 독립군 양성한 학교죠. 그렇게 되니까 한 일년 댕기다가도 독립군으로 나가는데.
그때 명동중학교 안에 독립신문 발간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교장을 중심으로 한 학교 선생들이 독립신문을 발간한 겁니다. 맨든 신문을 어떻게 펼치는고 하니, 학생들한테 줍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공부는 2차고 우선 독립정신 공부하는 게 제1목적이니까 신문 발행되면, 무슨 핑계라도 대고 나가게 되죠. 집에 돈 가지러 간다, 옷 가지러 간다, 아파서 간다 해도 다 알죠. 어떤 필이 오니까. 그래서 학생들은 그걸 배에다가 넣는 겁니다. 배에다가 신문을 둘르고, 간도에서 제일 높은 오랑캐령 구십리를 다섯 사람, 열 사람이 모여서 넘어갑니다. 그때 우리가 그 령을, 독립신문 배에다 차고 넘어서 두만강꺼정 오지 않습니까? 배를 안 타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달려가지고, 옷 속에다가 독립신문을 넣고 머리꼭대기에다 입니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는 겁니다. 밤은 새카마니까. 그걸 최경재 목사라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전달하면 그 목사가 자기 아는 계통에 있는 이들에게 독립신문을 전달합니다. 간도 명동학교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최경재 목사가 하루는 우리를 부르더니, 서울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는 겁니다.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netrin@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