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장이 빠른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로케이션 매니저의 입장에서 한국의 로케이션적 재원은 확실히 부족한 게 사실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갈 직전’이라고 해야겠다. 도대체 그동안 뭘 했다고 벌써 고갈이란 말을 써야 할 정도일까.
‘T -money’ TV CF의 한 장면. 눈을 뿌리니 한껏 더 이국적인 풍경이 됐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건축적 가치가 있는 많은 건물들이 파괴됐다. 그나마 남아 있었던 개항 이후의 근대식 건물들은 일제 잔재 제거의 명목으로 헐리고 개축됐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적은 건축비로 빨리 올라갈 ‘평범한’ 건물들로 거리가 메워졌다. 이는 한국 근대 건축의 형태가 일관성은 고사하고 다양성마저 상실한 첫 번째 원인인 것 같다. 발전된 조국건설을 표방하며 빨리빨리 만들어진 건물들은 대리석과 타일로 외장을 통일시켰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고도제한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테헤란로와 여의도 빌딩군은 스카이라인이 없는 도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새것도 언젠가는 ‘헌것’이 된다.
오래된 것은 후진 것이 아니라오
사람들은 뭔가 오래되면 헌것 또는 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오래된 것들에 대한 가치는 저평가된다. 조금 오래됐다 싶으면 헐어낼 생각부터 하게 만든다. 결국 서울에는 남아 있는 달동네가 없을 정도로 모두 재개발 폭풍을 맞이했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영상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들과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전봇대와 엄청난 간판들은 ‘평이한 일률성’이란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림 될 만한 곳 찾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군산이나 전주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인천 신포동, 북성동 일대’는 한국전쟁 이전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많이 간직한 보석 같은 곳들이다. 군산과 전주는 이미 영화를 통해 많이 등장했지만, 인천 신포동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1883년 1월1일, 조선이 개항하면서 많은 강대국이 조선 땅에 자국의 거류지를 인정받으며 들어왔다. 인천 신포동은 그 당시 일본, 독일, 영국, 청나라, 러시아, 미국의 거류지들이 공동구역을 이뤘던 곳이다. 영국과 독일의 건축가들이 지은 존스톤 별장, 영국대사관, 알렌별장 같은 건물들은 당시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멀리서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이 건물들은 당시 본국에서 가져온 최고의 자재들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각각의 건물들이 가진 화려함과 견고함은 곧 각 나라의 건축미를 뽐내는 장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건물들은 인천상륙작전 때 소멸되고 말았다. 그중 아직 잘 보존된 건물들도 있다. 일본18은행지점, 일본58은행지점, 인천우체국, 홍예문, 답동성당 등이 그 예다. 이 건물들은 촬영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획기적 디자인의 검은색 기둥 가로등
인천 중구청 주변의 신포동과 북성동 일대에는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이 있다. 건물 외벽과 간판들을 리모델링해 개항 직후 도시의 시대적 특성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항목이 가로등이다. 흔히 도심에서 보는 알루미늄 철제의 재질에서 탈피해 프라하의 밤거리를 비출 것만 같은 검은색 기둥을 가진 가로등이다. 지방 헌팅을 다니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 고장 특산물이 한우라고 해서 가로등 꼭대기에 한우가 한 마리씩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길거리 양쪽으로 한우가 올라붙은 가로등이 수백 미터 늘어섰다고 상상해보면 그림이 썩 좋지 않아 당황할 때가 많다. 차라리 갈매기가 한 마리씩 올라앉은 지자체는 좀 나은 편이다. 이러한 지역특산물을 상징화로 만든 지자체의 가로등에 비한다면 인천 신포동 일대의 가로등은 정말 획기적인 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인천의 낮보다는 밤 분위기가 더 좋다. 밤은 많은 것을 감춰주기도 하지만, 낮엔 볼 수 없었던 거리의 새로운 생명력이 살아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밤 촬영은 아니었지만 얼마 전 ‘T-money’ TV CF(1월말 방영예정)를 인천 중구청 주변에서 촬영했다. 이날 현장을 진행하면서 눈 내리는 거리 풍경이 마치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일본의 조용한 거리를 보는 듯한 건물들의 외형과 정리된 간판들이 한껏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거리에 전봇대와 거미줄같이 늘어진 전선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가 바랐던 모양새인지 모른다. 인천 신포동처럼 좀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지역적 특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개발의 성과’가 아닌 ‘역사적 가치의 성장’을 지향한다면 영상을 만드는 이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