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르게 다가서는 벽은 숨통을 죈다. 모퉁이 없이 사방이 툭 터진 공간에 나서면 불안하다. 우리는 적당히 숨고 이따금 드러나기를 원한다. 활개치기를 열망하다가도 이내 기댈 곳을 찾는다. 벽은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막아선다. 상반된 두 욕망의 긴장을 잘 해결한 건축만큼 아름다운 구조물도 없다. 폐소공포증과 광장공포증 사이에서 뒤척이는 우리의 일생은, 각자에게 맞춤하게 반투명한 벽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 아닐까? 에두아르 뷔야르(1868~1940)는 네벽으로 둘러싸인 실내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였다. 평생 독신인 채 어머니와 살았는데 드레스 짓는 어머니의 일 덕택에 집 안에는 옷감과 레이스가 흐드러졌다. 과연 뷔야르가 묘사하는 벽지와 식탁보의 무늬는 인물을 삼킬 듯 강렬하다. 그는 아마 양탄자와 커튼의 사방무늬를 헤아리며 자신을 포위한 세계를 더듬기 시작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정적이고 내성적인 삶이었지만 뷔야르가 고독한 인간이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는 친밀한 소수의 친구와 가족으로 촘촘히 짜인 털실 목도리와 같은 인간관계에 포근히 안겨 지냈다. 나비파 동료들이 종교적 소재와 이국적 풍경을 그릴 때도 뷔야르의 붓은 잘 아는 사람들의 초상과 주변 풍경에 머물렀다.
실내와 외계를 구분하고 연결하는 벽과 창도 뷔야르의 중요한 테마였다. 회화의 장식 기능을 긍정한 *나비파(Nabis)의 일원인 그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연극 세트를 제작했고 부유한 후원자의 거실과 식당 벽에 걸릴 큼직한 그림을 그렸다. 벽의 수직성을 존중하려는 듯, 세로가 긴 화폭도 즐겨 택했다. <뱅티미유 광장>(1911)은 이를테면, 벽을 창으로 ‘위장하는’ 그림이다. 현대 건물에서 유리벽은 흔히 “감금에 저항하고 소통을 지향한다”는 건축가의 주석을 동반하는데, 뷔야르도 비슷한 소망을 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화가는 1907년 이사한 파리 몽마르트르 아파트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타원형의 아담한 광장을 여러 차례 다양한 프레임과 앵글로 화폭에 옮겼다. 그 장소를 매일 바라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과 확신을 담아서. 패널 다섯장으로 이루어진 1911년작을 둘러친 테두리는 영락없이 창틀이다. 세로가 긴 낱낱의 패널을 병풍의 한폭이라 치고 차례로 펼친다면 이 그림은 아주 침착한 패닝 숏이 될 것이다(뷔야르가 앞서 1908년에 완성한 동명의 그림은 다른 시간대 광장 좌우 풍경을 두 패널에 병치해 시간의 흐름을 함축하는 기교도 시도했다). <뱅티미유 광장>의 화면은 망원렌즈의 그것처럼 평평하여 3차원의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오라고 유혹하지 않는다.‘물끄러미’라는 부사 하나를 완전히 형상화한 다음 만족하여 “다 이루었도다”라고 속삭인다.
“평생 나는 구경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고백한 뷔야르는 타인의 장점 뒤에 숨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 세상과 화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뉴욕 현대미술관 5층에는 뷔야르의 풍경화 <공원>이 있다. 맞은편 벽을 통째 차지한 모네의 <수련> 앞에 북적이는 관람객 등을 바라보며 <공원>은 언제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뱅티미유 광장>에는 오후의 명상에 젖은 중년 소시민 화가의 초상이 숨어 있다. 창가의 안락의자는 뷔야르가 야외와 실내, 해방감과 안정감 사이에서 찾아낸 절묘한 점이지대였으리라. 나는 <뱅티미유 광장>에서, 고립과 대결하는 지극히 부드러운 전술을 본다.
*나비파 자연을 곧이곧대로 옮기는 인상파 기법이 성에 차지 않았던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등의 나비파는 주관을 통해 형태와 색을 걸러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디자이너였다.‘나비’는 아랍어와 헤브루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만큼 자못 비장한 작명이었지만 미술사에 큰 탑을 쌓지는 못했다. 나비처럼 다가올 봄의 징조를 잠시 알리고 하느작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