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내게 말을 건 뒤로, 내가 맨 처음 행동에 옮긴 것은 보험을 해약하는 일이었다. “살아야 할 오늘은 있어도 대비할 미래란 없다”는 사실도 사람 아닌 어떤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보험금을 찾아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쇼핑백에 현찰로 담은 다음, 피시방에 가서 원없이 게임을 하고, 낮에는 순두부와 자장면, 볶음밥, 라면, 김밥 등등 분식집 메뉴판에 적힌 모든 메뉴를 번갈아가며, 밤에는 치킨과 생맥주를 시켜먹으면서 한푼도 안 남기고 다 썼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돈이란, 현대의 주술사들이 특별한 주문을 걸어놓은 종이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의 본질이 나무임을 아는 순간, 그 주술의 힘은 사라지는 것이었으므로.
빚진 것은 다 떼어먹었다. 내가 무언가를 빚내는 그 순간, 그래서 빚진 사람이 되는 그 순간, 사실은 빚을 다 갚은 셈이라는 우주의 수학도 깨우쳤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숫자놀음에 불과한 자본주의 수학이나 경제학에서는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이고, 나도 쉽게는 가르쳐주지 않을 작정이다. 가르쳐준다고 해도, 그 말을 믿고 흉내낼 상상력 풍부하고 배짱 두둑한 사람들도 거의 없을 테니까. 시간이 많이 남는다면, 페르마의 공식을 푸는 수학도처럼, 어째서 그렇게 된다는 것인지 목매달고 논리적으로 추리해보는 일까지야 말리지 못하겠지만.
보험이나 휴대전화를 해약하는 일보다 사람관계를 청산하는 일이 훨씬 더 쉬웠다. 사람들은 말에 약하다. 진심을 읽어내는 능력이 적을수록, 말에 상처받는 능력이 커지는 법. 나는 내가 평생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비수 같은 절교의 편지를 썼다. 우리가 맺었던 관계는 다 가짜야.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 이용했을 뿐이지. 친구든, 선배든, 누구든, 사실은 다 보험이었어.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어도 내 옆에 있을 수 있는지.
평소 가장 나를 위해준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원수로 만들어놓고도 나는 태평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들이 알고 있던 나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던 나도 아니고, 같은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인 전혀 새로운 캐릭터이므로.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되어 게임의 룰에 따라 스킬 향상과 레벨업에 목매달다가 더 좋은 게임이 출시되면 하루 아침에 컴퓨터 칩 한구석에 매장당할 게임상의 캐릭터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실제로도 게임상의 캐릭터였으므로.
그 무렵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성인판이었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체험을 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집약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