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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드라마의 모든 것] 울화를 삭여라, 다 복수해주마!

남들이 막장드라마라 해도 <아내의 유혹>에 빠져 사는 이유

아줌마들만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젊은 언니, 오빠들도 본단다. 도대체 이들에게 막장드라마는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많은 막장드라마 중에서도 특히 <아내의 유혹>에 빠져 있다는 한 20대 여성시청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막장드라마는 어떤 맛인지, 그리고 그 맛에 어떻게 중독되고 있는지.

막장드라마를 싸잡아 욕하는 데 불만있다. 통속극더러 갈등과 결말이 뻔하다고 욕하는 것은 장르가 쌓아온 규칙과 클리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는가, 한 토막의 멜로디를 어떻게 변주하는지를 살피듯 통속극도 장르 안에서의 만듦새로 평가해야 한다. 궤변과 기행을 일삼는 상식 밖의 캐릭터나 우연에 기댄 전개만을 비난하자면 홍상수도 막장이게?

<아내의 유혹>

여기저기 넘치는 원고지 매당 만원짜리 계몽들에 휘둘려 소소한 즐거움 대신 죄책감을 떠안느니 나는 막장드라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련다. 더 정확하게는 SBS 일일극 <아내의 유혹>을 좋아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임성한이나 문영남 등 막장의 대모 격인 이들의 드라마를 즐겨본다고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독한 대사와 선악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복수에 집착하는 임성한의 여주인공이 흥미진진하긴 해도 극중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앉아 나누는 대화(‘중식에 화학조미료가 많이 들어가 해롭다’등)를 후식으로 과일 먹는 자리까지 거의 리얼타임으로 늘여가며 시청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들은 꽤 지독했다. 또한 문영남 작가의 인물들이 내뱉는 한탄과 악다구니는 내러티브가 살아 있는 전라도 욕설마냥 구수한 맛이 있지만, 툭하면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지랄발광을 하는 불륜남의 모습은 분명 시각적으로 불쾌했다.

그럼에도 계속 보는 이유는? 길티플레저 외엔 별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무튼 임성한-문영남 2강 체제 아래 불치병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알량한 화해를 이끌어내는 일일극이 높은 시청률에 안주하며 스타일의 정체를 거듭하는 이즈막, 홀연히 나타난 것이 바로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이다. 아내 친구 신애리(김서형)와 바람난 정교빈(변우민)은 아내 구은재(장서희)를 물에 빠뜨리고 수영을 못하는 은재는 아이를 잃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은재는 신분을 숨기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의 재능을 이용해 복수에 나선다는 게 기본 줄거리다.

<아내의 유혹>의 세계는 읍면단위의 5일 장을 연상시킬 만큼 좁고, 잦은 우연과 기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드라마의 어디가 나쁘고 허술한지는 다른 지면에서도 차고 넘치는 이야기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사가 독하고 자극적이며 남부럽지 않은 미치광이들이 곳곳에 포진한 이 드라마에 불륜, 복수, 변신과 출생의 비밀 등 막장드라마로 분류되는 통속극의 요소가 고루 담긴 것은 물론이다. 여타의 막장드라마들이 갈등 요소를 질질 끌다 못해 도리어 극이 매몰되는 되는 일이 잦은데 반해 <아내의 유혹>은 갈등의 진행과 사건 전개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침이 없다. 불륜녀 신애리의 거짓 임신 소동은 바로 그 회에 들통이 나고, 한회 안에도 숨막힐 정도로 여러 번 인물들의 권력관계가 역전된다. 아, 이 미칠 듯한 스피드!

<아내의 유혹>은 비록 날지는 못하나 시속 65km로 질주하는 타조를 닮았다. 그리고 등장인물 또한 죄다 타조의 품성을 지녔다. 겁에 질린 타조가 빠른 다리를 버리고 모래에 고개를 처박아 버리듯 이들은 위기에 몰리면 생각지도 못한 극단적인 행동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비밀을 밝히라 추궁당하면 다짜고짜 그릇을 깨고 그 조각 위에 딛고 서서 결백을 증명한다거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하자 도망가는 대신 기습 키스로 위기를 넘기는 인물들. ‘저런 사람들이 어딨어?’ 거듭 되물어보지만 답은 뉴스에 있다.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변명과 궤변을 일삼는 분들이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것이 더 어이없는 현실이다.

물론 드라마가 구질한 현실을 좇을 필요는 없다. <아내의 유혹>이 퍽이나 정치적인 드라마라는 이야기도 격에 맞지 않다. 하나 이 드라마의 호쾌한 복수는 눈여겨볼 만하다. 당할 만큼 당하고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은재네 식구들은 더이상 참지 않는다. 죽은(실종된) 딸이 부당하게 모욕당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아침에 출근하는 전 사돈에게 새우젓을 뿌리며 이치를 따지고 든다. 십년 전 드라마 <허준>처럼 아무리 핍박받고 오해와 모략에 시달려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눈으로 소처럼 견디다 보면 언젠가 누명이 밝혀질 것이라는 안일한 희망 따위는 집어치웠다. 아마 <아내의 유혹>이 이토록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력하나마 울화를 삭이고 오늘을 견디게 해줄 자잘한 복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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