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준비는 됐나.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은 지난 2008년 11월3일 방영된 첫회에서 이렇게 묻는다.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 은재(장서희)가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그녀는 “제발 아기만 살려달라”고 절규한다. 곧바로 회상이다. 은재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친구 애리(김서형)가 있다. 재벌집 장남인 교빈(변우민)은 은재를 좋아한다. 교빈을 좋아하는 애리는 은재를 질투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교빈은 은재가 취해 쓰러질 때까지 술을 먹인다. 바로 여관장면. 교빈이 침대에 누운 은재의 옷을 벗기며 말한다. “은재야, 죽을 때까지 너만 사랑할게.” 은재는 임신하고 애리는 분노한다. 교빈은 은재의 오빠에게 얻어맞고, 은재는 교빈의 엄마에게 ‘싸대기’를 맞는다. 교빈이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은재와 교빈의 결혼. 그런데 갑자기 신부가 애리로 바뀐다. 그리고는 은재의 장례식이다. 교빈과 애리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뒤로 나타나는 한 여자. 선글라스를 벗으면 은재의 날카로운 눈빛이다.
가족, 중장년층 여성시청자의 굴레
그럼 여기서 모든 이야기는 다 끝난 것 아닌가, 라고 묻고 싶어진다. 모든 캐릭터들은 설명됐다. 죽어가면서도 아기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불쌍한 여자, 그녀를 질투하는 또 다른 여자, 착한 여자를 괴롭힐 못된 시어머니, 자신을 강간해 남편이 된 남자, 그리고 모두가 죽은 줄 알지만 살아 있는 여자. 그들의 일일드라마다운 이야기도 다 드러났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일드라마의 첫회고, 35분의 방영시간 가운데 2분에 불과하다. <아내의 유혹>은 여기서부터 일일드라마의 팬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은 아닐지라도, 그 모든 걸 보여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거칠디거친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탈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다. “내일 저녁 7시20분에…” 또 보자는 쿨한 인사와 함께.
‘막장드라마’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의 모든 것들을 흡수했다고 한다. 불륜과 패륜, 강간, 강제 낙태, 법적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한을 품은 여자의 복수극까지. 약 1년 전, SBS 일일드라마 <행복합니다>가 배우 이휘향의 가슴 노출로 ‘막장’이란 단어를 운운하더니, MBC 아침드라마 <흔들리지마>와 SBS 주말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이 판을 굳혔고,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이 막장드라마 담론을 이끌었으며, <너는 내 운명>의 ‘발호세’와 MBC 미니시리즈 <에덴의 동쪽>의 ‘발연희’가 UCC의 소재로 등극한 것에 이어 지금은 <아내의 유혹>이 막장 논란의 정점을 달리는 것이다. 어쩌다 모든 공중파 방송사는 막장드라마란 괴물을 잉태한 걸까. 도대체 이 괴물이 자란 세상은 어떤 세상이기에.
현재 막장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소재의 자극성과 억지스러운 이야기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시청률과 결부된다. 시청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했고, 오래 살아남기 위해 갈등에 갈등을 겹쳐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막장으로 불리는 드라마들이 구체적인 소재와 장면들까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같은 이유로 지적당한다는 것이다. 불륜과 패륜 같은 자극적인 소재, 독성이 강한 표현 수위,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그리고 그 모든 이유가 현재 드라마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로 꼽힌다. 지금 막장드라마들은 마치 한 동네에서 벌어지는 소동극과 다름없을 정도다.
막장드라마로 불리는 드라마들이 모두 가족이란 집단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너는 내 운명>은 한 고아소녀의 가족 만들기 과정을 다루고 있고, <흔들리지마>는 부모의 재혼으로 자매가 된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강지처클럽>과 <아내의 유혹>은 제목에서부터 ‘가족’을 드러내며, “현대인이 잊어버린 휴머니즘을 일깨울 것”이라고 기획의도를 이야기한 <에덴의 동쪽>도 사실은 원수지간인 두 가족의 대립을 다룬다. 물론 이들이 대부분 일일드라마나 아침드라마, 주말드라마인데다, 이들의 고정 팬들이 중장년층 여성시청자라는 점에서 ‘가족’은 숙명 같은 소재일 것이다.
연기자도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가족’을 데리고 어떤 이야기를 펼쳐나갈 것인가. 이때 경우의 수는 방송국이나 시립교향악단, 커피전문점을 집단으로 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후자의 집단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만, 가족이란 집단은 구성원 각각의 목적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드라마는 이 경우의 수를 이용해 어떤 소재든 활용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지금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들이 수많은 장르를 품을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유혹>은 주인공 은재가 남편의 바람기에 상처받고 그녀의 애인에게 두번 죽는 불륜드라마다. 그리고 죽은 은재가 다시 살아나 복수를 다짐하는 스릴러물이다. 은재를 (아마도) 사랑하게 될 건우(이재황)와의 연하남 로맨스이기도 하며, 건우와 그의 동생 소희(채영인)는 법적 남매의 슬픈 멜로드라마를 펼친다. 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은재와 역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애리의 대결은 전문직 드라마고, 건우의 엄마 민 여사(정애리)가 정하조(김동현)의 천지건설을 향해 펼치는 복수극은 기업드라마다.
<너는 내 운명>은 어떤가. 호세와 새벽의 결혼과정은 실장님과 말단 여직원의 트렌디 로맨스고, 새벽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수빈과 경쟁할 때는 또 전문직 드라마다. 새벽의 큰오빠 태영이 자신의 첫사랑 수정을 만나는 건 또 연하남 로맨스다. 새벽의 작은오빠 태풍(이지훈)이 호세의 동생 유리와 결혼하려 하는 순간에는 <보고 또 보고>의 겹사돈 이야기가 된다. 혼종이라기보다는 잡종에 가까운 이러한 특징은 <조강지처클럽>과 <에덴의 동쪽>에서도 나타난다. <조강지처클럽>은 불륜드라마로 시작하지만 나화신이 패션업에 종사하면서 전문직 드라마가 되고, 그녀가 구세주(이상우)를 만나면서 실장님 로맨스가 된다. <에덴의 동쪽>이 품고 있는 드라마는 더 방대하다. 시대극, 액션활극, 정치드라마, 기업드라마, 멜로, 로맨틱코미디 등등. 말하자면 가족드라마가 가진 수많은 경우의 수가 막장드라마의 태생적 환경이자, 장수의 비결인 셈이다.
물론 막장이라 불리지 않는 드라마들도 여러 장르를 서브플롯으로 품는다. 하지만 이들이 정량을 섭취해 소화한다면 막장으로 불리는 드라마들은 과식한다. 그러니 드라마의 진행과정에서 컨셉과 인물의 성격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과거 임성한 작가의 <인어아가씨>가 시즌1, 2로 나뉘었던 걸 떠올려보자(진짜 시즌제였다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그렇게 구분됐다는 거다). 주인공 은아리영(장서희)의 복수극으로 시작해 시즌1을 마감한 <인어아가씨>는 시즌2를 통해 아리영이 오늘은 어떤 음식을 만들어 시부모에게 공양할지 하루 종일 고민하는 결혼생활을 보여줬다.
당시 제작진은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아무리 막장으로 치닫더라도 잘 나오는 시청률을 외면할 수 없는 TV드라마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사례는 <너는 내 운명>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드라마가 약 170회를 넘는 동안 <너는 내 운명>은 주인공 새벽의 가족 만들기로 시작해 새벽의 시집살이 드라마로 이어졌고, 막바지에 다다르자 새벽의 친모가 벌이는 기업적·의학적 복수극으로 탈바꿈했다.
이야기에 따라 캐릭터도 변신했다. 새벽에게 멋진 왕자님이었던 호세는 결혼 뒤에는 ‘노바디’를 외치는 닭살남편이 됐고, 이어 이도저도 아닌 남자가 됐다. 캐릭터의 변색은 노련하지 않은 젊은 배우들에게 급기야 연기력 논란을 가져왔다. 박재정은 발호세가 됐고, <에덴의 동쪽>의 이다해는 자신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차했다. 발호세 논란만 놓고 본다면 이것은 배우 박재정의 연기력이 정말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연기를 해도 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불륜과 패륜’이라는 양대 키워드
막장드라마를 둘러싼 가족드라마의 테두리는 소재의 자극성과 그로 인한 도덕성 논란까지 빚어냈다. 사실 소재가 자극적이라기보다 갈등이 자극적이다. 가족드라마에서 가장 큰 갈등의 대상은 당연히 가족을 해체하려는 어둠의 세력이다. 그것은 선진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나 악법을 시행하려는 대통령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막장드라마들은 중심적인 이야기나 곁가지로서나 불륜과 패륜이라는 똑같은 패를 쥐고 있다. 이는 같은 소재를 다룬 몇몇 드라마들, 예를 들어 <내 남자의 여자> 같은 작품이 크게 히트를 하면서 양상된 아류작의 형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히트작들이 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작가의 역량과 함께 또다시 제작진이 규정한 고정 팬층이 누구냐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들 드라마에서 가장 강력한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이 못된 내 남자나, 그의 못된 어머니나, 내 남자의 못된 여자인 것은 어디까지나 고정 팬인 중장년층의 여성시청자를 의식한 처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똑같은 패를 들고 있는 드라마들끼리 시청률을 놓고 경쟁하면서 시청자의 도덕 선을 넘나든다. 더욱 독한 갈등을 찾다보니 주인공은 더욱 착하게, 더욱 불쌍하게, 사실은 더욱 미련하게 설정한다.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세력은 더욱 악독하게 그려놓는 것이다.
특히 악인을 묘사하는 막장드라마의 태도는 이 시장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이다. 막장드라마 속 악인들과 가장 비슷한 모델은 사극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TV드라마 밖이라면 이원호 작가의 소설이나, 김성모 화백의 만화다). 권력과 성공을 향한 암투극이 가족드라마 안에서 그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혹은 지금 좀더 나은 신분을 위한 투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자의 침소에 방자를 놓거나, 중전을 해하기 위해 지푸라기 인형에 바늘을 꽂듯이 당연히 이들도 돈과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해나간다.
그런데 이 장애물 역시 가족이라면 어떨까. 가족을 해체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가족이고 그 가족이 제거해야 하는 것도 가족인 갈등의 구조는 막장드라마들에 불륜과 패륜이 한데 엮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다. <흔들리지마>의 수현에게 장애물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시아버지였고, 그래서 그녀는 시아버지의 졸도를 방치한다. 비밀을 알게 된 동생의 여자친구는 청부살인으로 죽이려다, 기억상실증으로 만든다.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조민기)은 자신의 야망을 가로막는 장인이 미워서 그 역시 장인의 졸도를 방치한다. 게다가 그는 이미 1회에서 불륜 상대였던 여자가 임신한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켰다.
심지어 <아내의 유혹>의 정교빈은 48부가 진행되는 동안 4명의 아이를 잉태시켰지만, 제대로 낳은 아이가 없다. 은재를 강간해서 임신한 아이는 사고로 유산됐지만 귀찮아서 은재의 탓으로 돌렸다. 5년 전 애리와의 불륜으로 낳은 니노는 낳은 줄도 몰랐다가 다시 만났다. 1회에서 “미역이든 소꼬리든 몸에 좋은 건 다 해먹으라”고 달래던 또 다른 애인이 임신한 아이는 아예 잊혀졌다. 그리고 은재가 7년 만에 임신한 아이는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낙태시키려 했고, 결국에는 임신한 은재를 바닷물에 버려놓고 온 탓에 유산됐다. 하지만 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악행을 저지르는지를 그들의 내면에서 찾기란 어렵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악행은 갈등의 독성을 끌어올려 시청률을 올리려는 제작진의 음모일 뿐이다. <아내의 유혹>이 정교빈의 악행으로 막장드라마의 최전선에 선 드라마가 된 한편,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독한 갈등의 독성이 드라마를 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정교빈도 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인 것이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허울마저 벗어던져
말하자면 막장드라마는 가족드라마란 태반에서 가족드라마가 할 만한 모든 것들을 먹고 뚱뚱해진데다, 그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독한 갈등들까지 섭취한 괴물이다. 그리고 지금 이 괴물은 드라마 시장의 위기에 찾아온 시청률 경쟁의 유일한 강자로 인정받으며 TV편성표를 넘나든다. 천황시해사건을 다룬 MBC 미니시리즈 <분노의 왕국>으로 데뷔해 독성없는 가족드라마였던 <바람은 불어도>와 <정때문에>를 집필한 문영남 작가가 <조강지처클럽>를 집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에덴의 동쪽>의 나연숙 작가가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면서 <흔들리지마>의 이홍구 작가가 투입된 것도 눈여겨봐야 할 일이다. 현재 한국 드라마의 트렌드 자체가 이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의 최정점이라 불리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막장의 클리셰를 흡수한 <아내의 유혹>은 가족드라마라는 외피마저 벗어던졌다. <아내의 유혹>은 기획의도에서 “자신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남편의 가정을 철저하게 파탄내버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아예 적시한다. 이제는 허울이라도 가족의 사랑을 운운하지 않는 시대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대놓고 들이대는 막장의 기운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중독으로 이어진다. 일일드라마의 최강자인 임성한 작가가 미니시리즈까지 집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나중에 후회한다고 해도 시청자에게는 <아내의 유혹>의 은재나 <에덴의 동쪽>의 양춘희 여사 가족처럼 복수할 대상이 없다. 그저 내일 저녁 7시20분을 기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