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선 알 수 없다. 폴 버호벤의 <블랙북> 여주인공이라고 해야 겨우 아하, 탄성이 새어나올지도 모르겠다. 캐리스 밴 허튼은 <블랙북>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완벽한’ 독일 여성으로 변신한 유대인 레지스탕스 레이첼/엘리스를 연기했다. 전쟁 한복판이 아니었다면 이런 캐릭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꺼이 몸이라도 팔겠노라 다짐하는 레지스탕스와 마를렌 디트리히의 환생인 듯한 창녀 이미지, 똥 무더기를 뒤집어쓰는 피해자를 오가는 레이첼/엘리스는 캐리스 밴 허튼 덕에 납득 가능한 진정성을 담보했다. 폴 버호벤은 그녀를 향해 “지금까지 이처럼 재능이 넘치는 여배우와 일해본 적이 없다”고 극찬을 퍼부었다. “<원초적 본능> 시절의 샤론 스톤과 비교하라고? 캐리스는 진짜 연기를 할 줄 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최신 극장으로 몰려다닐 때, 캐리스 밴 허튼은 아버지와 함께 찰리 채플린과 로렐&하디의 무성 코미디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다.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뛰어난 재능을 겸비한 그녀는 연기를 시작하자마자 단박에 네덜란드 최고의 배우로 급부상했지만, <블랙북>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2년 만에 재등장한 그녀의 후속작은 (최종 편집 단계에서 모조리 분량이 잘려나간 <바디 오브 라이즈>를 제외하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였다.

<작전명 발키리>에서 밴 허튼은 톰 크루즈가 맡은 슈타펜버그 대령의 아내 니나 역으로 20분가량 등장할 뿐이지만 그 짧은 시간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슈타펜버그가 대의명분과 개인적 안위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용하고 압도적인 존재감. 슈타펜버그가 운명의 ‘발키리 작전’에 돌입하던 그 순간, 니나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내세우거나 아버지의 의무를 들먹이며 남편을 가로막지 않는다. 니나와 슈타펜버그가 헤어지는 장면은 영화에서 두번, 의미심장하게 커트되어 등장한다. 그 흔한 오열 없이도, 감정이 어느 정도로 침묵 속에서 폭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에너지로 가득한 아름다운 장면이다. 밴 허튼 본인이야 “브라이언 싱어가 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감독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무척 열등하다고 느낄 정도였다”라고까지 고백했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 차갑고 고통스러운 영화에서 온기 한번 느낄 여지도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이 배우를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