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이언맨>의 연극 버전이라 지레짐작하면 큰일난다. 미남이고 명석하며 심심할 때마다 철갑옷을 입고 폼나게 악당들을 날려버리는 토니 스타크와 <강철왕>의 ‘스테인레스맨’ 왕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열처리 공장의 차기 사장. 댄서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무릎 꿇은 유약한 영혼. 열처리로에 감금된 뒤 온몸이 스테인리스로 변해가는 비운의 청춘. 왕기가 물려받을 공장은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이 소유한 첨단 기술의 집약체와는 거리가 멀다. 변신한 그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위험에 빠진 이웃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스테인리스로 바뀔 뿐이다. 인간의 노동을 숫자로 환산하는 아버지, 그에 반발해 자신을 가둔 공장 노동자들, 가십에 솔깃한 사람들에 지쳐. 그러니 포스터에 커다랗게 적힌 대로 ‘스트레스, 스테인레스를 만든다’. 오, 스트레스에 찌든 구질구질한 우리 인생이여.
결론만 말하자면 세상 누구라도 공감할 내용이지만 이 연극,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좋게 표현하면 구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텅 빈 무대 위에, 연습복 같은 단출한 의상을 걸친 인물이 등장하더니 느닷없이 격렬한 댄스를 선보인다. “선량한 에너지가 끝내 트라이엄프를 만끽하는 순간을 꿈꾼다”는 식의 다분히 작위적인 비문을 쏟아내면서. 각본까지 겸한 고선웅 연출가의 별명이 ‘구라빨’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일부 관객에겐 늦은 후회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극과 무용, 뮤지컬 등의 구분에 주먹을 날리고 웃기려는지 울리려는지 판단하기 힘든 몇분간이 지나면, 닳고닳은 신파도 뻣뻣한 사회비판극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업그레이드 안되는 인생에 좌절한 당신이라면 온몸을 땀으로 적시는 배우들의 열연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고선웅 연출가가 2005년 창단한 신생극단 마방진에서 전하는 놀랍고도 신선한 파이팅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