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 방송사들이 굵직한 다큐멘터리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국내 CG기술의 진보와 이를 토대로 한 팩션 다큐의 가능성을 보여준 EBS <한반도의 공룡>을 시작으로, 매운맛의 전파로를 되짚는 문명 다큐인 MBC <스파이스 루트>가 길을 열었고, KBS <누들로드>가 국수로 세계 다큐시장을 석권하겠다고 나섰다. MBC가 1년 동안 공들인 초대형 다큐 <북극의 눈물>도 방송을 시작했다.
경제 한파로 그 어느 때보다 긴 겨울이 예고되는 방송가에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다큐멘터리는 ‘찬밥’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외부 투자와 해외 판매, 그리고 무엇보다 참신한 소재 접근과 탄탄한 만듦새를 무기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는 심정으로, 각 방송사들이 자존심을 걸고 내놓은 명품 다큐들을 ‘즐감’하시길.
국수로 동서양 문명사를 좇는 <누들로드>
지난해 KBS에서 방영한 <차마고도>는 다큐멘터리 사상 최다 수상기록을 남겼다. 일본상 특별상, AIBD 월드 TV상 우수상 등을 받았고, 국내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에미상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작품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등에 업고 해외 판매도 순조롭다. 현재까지 아시아, 유럽 등 18개국에 판매됐고, 40여개국에서 전파를 탔다.
<차마고도>를 통해 다큐멘터리 시장 개척에 나선 KBS가 이번엔 국수로 동서양의 문명사를 좇는 <누들로드>를 선보였다. 평범하지만 전세계인의 식탁에 올라올 정도로 특별한 음식인 국수의 탄생과 전파 경로를 통해 음식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추적한 음식문화사다. 7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내년 1, 2월까지 총 6부작을 방영하는 <누들로드>의 제작기간은 총 2년. 기업 후원금을 보태 제작비는 총 9억원이 들었다. 촬영을 위해 제작진이 돌아다닌 나라만도 타이, 중국, 이탈리아 등 10개국이다.
<누들로드>는 기획 단계부터 해외시장 판매를 염두에 두면서 정통 다큐멘터리의 틀을 벗었다. 세계적인 아시아 퓨전요리 전문가이면서 영국 <BBC>의 음식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유명한 켄 홈을 프리젠터로 기용했고, 시공간을 초월한 인류의 음식 문명사를 보여주기 위해 재연과 특수 영상에도 공을 들였다. 국수 문화가 꽃피웠던 중국 송나라 거리, 일본 에도시대 등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생생하게 재현했다. 연출을 맡은 이욱정 PD는 “큰돈을 들여 다큐를 만드는 시기는 끝난 게 아니냐고 하는데 제대로 만들어 세일즈하면 수신료를 많이 쓰지 않아도 해외에 팔수 있다”며 “내수용이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 보는 고품격 다큐멘터리로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누들로드>는 국내 방영 전에 벌써 하이라이트 영상만으로 중국·대만·홍콩·헝가리 등 8개국에 방영권을 판매했다. <차마고도> <누들로드>의 제작책임을 맡은 김무관 PD는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한류 열풍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다음 시장을 여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싶다”면서 “이젠 투자의 개념으로 다큐멘터리 시장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첨단 촬영장비로 쓴 서사시 <북극의 눈물>
MBC 지난 1년 동안 20억원을 투입해 만든 3부작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일 방송을 시작으로 오는 14일과 21일 등 총 3차례에 걸쳐 방송될 <북극의 눈물>(일요일 밤 10시35분)은 북극의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대서사시다.
제작진은 북극곰과 바다표범, 원주민 이누이트족 등 북극의 바다 위 ‘얼음 대지’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생명들의 오늘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국 <BBC>의 화제작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최첨단 항공촬영 장비 ‘시네플렉스’가 국내 최초로 동원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대지와 바다 위로 녹아내리는 건물 10층 높이의 빙산, 날으는 새떼들 아래 힘차게 달리는 수백 마리의 순록을 흔들림없이 잡아낼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잠수하며 깊은 울음을 우는 흰돌고래의 장대한 오페라, 육지의 둔중한 움직임만 보아선 짐작할 수 없을 만치 빠르고 민첩한 바다코끼리의 유영을 포착한 것은 세계적인 수중촬영 전문가의 도움이 컸다. 촬영 기간만 300일. 그동안 40분짜리 촬영테이프 400여권을 찍었고 제작진은 지구를 세 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 행군을 했다.
제작진이 국내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북극 생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대규모 제작비가 지원된 덕분이다. “한번 띄우면 1억원이 든다”고 알려진 시네플렉스도 순제작비 16억원이 확보된 덕분에 가능했다. 이중 12억원은 기업의 후원을 받았고, 4억원은 MBC가 투자했다.
<북극의 눈물>을 기획한 MBC 교양제작국 윤미현 CP는 “최근 ‘그린 경영’을 내세우며 다큐멘터리 제작 후원에 관심을 갖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며 “방송을 통해 직접적인 자사 홍보를 원하는 경우에는 곤란하지만,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한 방법으로서 다큐멘터리 후원이 활성화된다면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윤미현 CP는 또 “다큐는 수익을 내기 위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투자를 해야 하는 장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드라마처럼 애초에 해외 판매를 염두에 두고 기획할 수는 없지만, 잘 만든 다큐멘터리가 세계시장에서 팔리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한국 방송사들)가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