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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포뇨> 다섯살 동심으로 바다를 색칠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미리 보기

<벼랑 위의 포뇨>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녹슬지 않는 신공을 기다려왔다. 결과는 예상 밖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어느 전작보다 맑고 쉬운 동심의 영화를 만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피터팬이 세상을 꿈꾸는 방식. 다섯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니! <벼랑 위의 포뇨>는 그럼 어떤 영화일까. 확실한 것 한 가지. 올 겨울 당신의 아이에게 이걸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쁜 부모다.

“소년과 소녀, 사랑과 책임, 바다와 생명 이러한 자연의 것들을 서슴없이 그려내어 이 시대의 신경증과 불안에 맞서나가고자 한다.”-미야자키 하야오

실없는 퀴즈를 한번 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최근 애니메이션 중 가장 귀여웠던 물고기 주인공을 대시오. 누구는 <니모를 찾아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만하고 재미있었다. 니모가 변기를 통해 바다로 빠져나간 것이 기억에 깊이 남았던지 그 눈치 빠르다는 서양의 아이들조차 이걸 사실로 믿고 자기 집 어항에 사는 물고기도 니모처럼 돌려보내야 한다며 변기에 빠뜨려 물을 내리는 실제상황이 벌어졌다고 해외 뉴스들이 전한 적이 있다. 그 니모들이 바다로 가지는 못했겠지만 아이들의 행동은 순진무구하다.

<샤크>는 어떨까. 덜떨어지긴 했어도 이 영화의 주인공 상어 녀석은 아카데미영화제 시상식 사회를 맡아도 될 만큼 유머와 능청부리기의 일인자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그를 겁주는 어디서 많이 본 폭력배 상어(로버트 드 니로 상어)도 빼놓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이건 확실히 어른용이다. 술판의 농담과 인생의 비굴함을 좀 아는 어른들이 보면 더 재미있다. 그렇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가서 물고기는 아니지만 강가에 사는 전설의 동물 갓파쿠는 어떤가.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에 나오는 이 녀석이 선하고 신기하기는 하다. 그런데 어딘지 얜 좀 징그럽다. 그러니까 이 영화들과 더불어 <벼랑 위의 포뇨>를 당신의 다섯살 먹은 아이에게 보여주자. 그러고 나서 물어보자. “너는 어떤 물고기가 제일 좋니?” 아이의 대답은 말 대신 노래가 될지도 모른다. 포뇨~ 포뇨~ 포뇨~. 일본에서는 1200만(10월22일 일본 기준)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고 주제가 포뇨송은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영화가 4편이나 경쟁에 올랐건만 왜 한편도 상을 주지 않았느냐고 어떤 일본 기자가 투정부리듯 질문했다. 대답 대신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는 즉흥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예컨대 우리가 얼마나 <벼랑 위의 포뇨>를 좋아하는지 보여주겠다며 또 다른 심사위원 더글러스 고든에게 포뇨송을 불러보라고 시켰고 정말 몇초간 불렀다. 재치있는 퍼포먼스였고 볼멘 질문은 무력해졌고 화기애애한 일화만 남았다. 나비 넥타이를 맨 어른들까지 동심으로 이끄는 것이 <벼랑 위의 포뇨>다. 우리에게는 백발의 피터팬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그의 깊고 흥미로운 철학이 묻어나는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 비교하면 확실히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지만 이 대책없는 초낭만주의 유아애니메이션은 숨쉬는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벼랑 위에 선 소년, 소녀가 되고픈 물고기

미야자키 하야오가 4년 만의 장편 신작 <벼랑 위의 포뇨>를 구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소년과 소녀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일본에서 개봉하던 날 지브리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다 함께 해안으로 단체 여행을 갔고 그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눈에 들어온 풍경이 하나 있었다. 한 소년이 우두커니 벼랑 위에 서서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이 풍경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음에 신작에 대한 이미지를 주었다. 한편 바다를 바라보는 저 소년이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건 무엇일까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건 귀여운 물고기였고 소년을 만나 우정을 느껴 소녀가 되고 싶은 물고기였다. 작화감독 곤도 가쓰야의 세살짜리 딸아이를 모델로 삼았다.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태어났다.

포뇨가 처음 찾아왔을 때는 그냥 소녀 물고기였다(포뇨라는 이름은 소년이 지어준다). 바닷속 궁전에 사는 이 아이는 인간을 싫어하는 아버지 후지모토(그는 전에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바다의 여신과 결혼하여 바닷속에 살고 있다)의 눈을 피해 수면 근처까지 올라와 곧잘 일광욕을 즐긴다. 그러다 우연히 쓰레기를 수거하는 배의 철망에 걸리고 게다가 유리병에 갇히면서 벼랑 위의 집에 사는 소년 소스케의 눈에 띄게 된다. 이제 <벼랑 위의 포뇨>는 이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는 어른들은 이미 잊고 그들은 이미 할 수 없는 회복을 성사시킨다. 사랑과 책임의 문제가 바로 그 소년과 소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사랑과 책임, <인어공주>의 미야자키식 각색

한눈에도 알 수 있지만 <벼랑 위의 포뇨>는 안데르센의 슬픈 동화인 <인어공주> 이야기의 미야자키식 각색이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던 것 같고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들여온 테마일 것이다. 인어공주는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바다의 물거품으로 소멸해버렸다.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팔고 인간이 된 뒤 왕자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왕자는 사랑을 약속하지 않았다. 사랑을 얻지 못한 자기의 책임으로 그녀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포뇨는 우연히 소스케의 피 한 방울을 받아먹고 인간이 될 수 있었지만 아버지 후지모토는 포뇨를 데리고 다시 바다로 가버린다. 하지만 소스케는 포뇨를 잊지 않고 기다린다. 집 앞 대문에 초록색 양동이를 걸어놓고는 이렇게 해야 포뇨가 우리집인 줄 알고 찾아올 것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어느 날 거대한 해일과 함께 포뇨가 소스케를 다시 찾아오던 날 사랑의 꽃다발을 안은 것처럼 포뇨는 그 양동이를 꼭 품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스케와 포뇨의 사랑과 책임 혹은 약속은 더 발전하고 더 중요해진다. 바다의 여신인 포뇨의 엄마가 소스케에게 포뇨가 인어여도 괜찮느냐고 할 때 소스케의 대답은 무엇이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벼랑 위의 포뇨>는 <인어공주>와 반대되는 이야기다. 인어공주와 왕자의 비극성은 소스케와 포뇨의 낙관성으로 재해석된다. 사랑에 대한 약속이 책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년과 소녀가 약속을 다하고 어린 사랑을 지키고 서로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어른들의 불신이 이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사랑과 책임의 문제를 실은 이 어린 주인공들의 동심으로만 실천할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동심의 끝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그건 바로 이 영화에서 바다가 온통 세상을 덮는 풍경이다.

바다는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주인공이자 생명

마침내 바다가 세상을 뒤덮었다. 포뇨가 소스케를 찾아올 때 잘못하여 아버지의 생명의 우물을 건드렸고 세상은 물바다가 됐다. 물바다가 되다니. 이렇게 듣고 보면 이제부터 슬퍼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상이 물에 잠긴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한다. 쓰나미로 모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진짜 희망의 꿈을 꾸는 건 이제부터라는 얘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아니 그럴 수 있다. 다섯살 아이의 시각에서 물로 채워진 세상이란 황폐함이 아니라 넘치는 모험의 장이 된다. 포뇨와 소스케는 양로원에 할머니들을 돌보러 간 뒤 소식이 없는 소스케의 엄마를 찾기 위해 작은 양초배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

바다가 중요했으니 바다의 묘사가 중요했고 물결의 무늬가 중요했다. “이번 영화는 특히 파도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만장의 셀을 사용했다면 <벼랑 위의 포뇨>는 17만장이라는 셀화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냈다고 강조한다. “바다가 단지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던 그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다를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하여 아이들이 보는 바다의 느낌, 어른들이 보는 바다의 느낌 등 여러 가지를 살려내고자 했다.”

여기서 바다는 정말 가지각색 총천연색 무지개이며 자주 성을 내거나 웃는 다종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포뇨가 소스케를 찾아올 때 바다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오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의 여신이 등장할 때에는 온통 눈부신 금빛이다. 그리고 세상이 바다가 됐을 때 여기서 그 풍경이란 실은 재앙이 아니라 생명수로 넘쳐나는 낙원이다. 고생대에 살던 동물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체가 함께 어울리는 중간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기서 대립없는 생명력의 부활을 말하고 싶어한다. 자연의 생명. 그래서 그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을 넘치게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불구가 되어버린 오늘날 세상의 환경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모험의 장으로서 물세상이 오고 그들이 거기서 헤어지지 않으면서 웃고 있을 때 더 큰 희망극이 성사되리라 본 것이다. 그러니 이 대책없는 희망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비판해도 할 수 없다. 그러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째서 당신의 동심은 그렇게나 현실에 얽매여 있냐며 도리어 호통칠 것이다. 이 영화는 <스틸 라이프>가 아니다. ‘우리 마을이 물에 잠기면 스티로폼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노저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숨기고 싶었던 무책임한 다섯살 동심을 생각해보면 된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세상을 채운 건 그래서 실은 물이 아니라 비유로서의 동심이며 꿈이다.

바다와 육지로 격리되던 두 세계가 결국 완전한 하나의 꿈의 세계가 되어 온갖 생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결국 <벼랑 위의 포뇨>의 이야기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말한다. “다섯살 아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섯살 아이는 인간과 신의 중간단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쉰살 어른이 되어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기도 하는 그런 존재다.” 그러니 이 대책없는 낭만주의를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다섯살을 지나왔고 당신의 아이가 지금 다섯살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모두를 다섯살 아이의 시각으로 잠시 돌려놓기 때문이다. 그게 올 겨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용 양말 속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담아주고 가는 선물의 진실이다.

포뇨는 장난감 금붕어의 촉감?

일본 고전부터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모티브와 작명의 참조물들

단순하고 선명한 영화지만 <벼랑 위의 포뇨>의 갖가지 모티브와 작명에는 몇 가지 참조물이 있다.

일단 모티브에서 <인어공주>뿐 아니라 “한 어부가 해안으로 떠내려온 거북이를 따라가면서 생기는 이야기인 일본 고전 <우라시마타루>에도 기대었다”고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는 넌지시 밝힌다. 소스케라는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격인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에 등장하는 소년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 소년이 벼랑 위에 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마친 뒤 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을 읽으며 푹 빠져 살았고 소년의 이름을 이번 영화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포뇨라는 이름은 욕실용 어린이 장난감 금붕어를 생각해낸 뒤 그걸 만질 때의 촉감으로 떠올린 이름이다. 포뇨는 “고무공을 만질 때의 탱탱한 느낌을 표현하는 감탄사”라고. 그래서 영화에서 포뇨의 실제 이름은 따로 있는데 ‘브룬히루데’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처럼 “뭐 영화에는 딱 한번 나올 뿐”이지만 이 이름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2장 ‘발키리’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 중 하나다.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그너의 음악을 많이 들었고, 그때마다 “이 음악은 아드레날린이 넘치게 한다”고 말했다 한다. 유심히 들어보면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가 만든 <벼랑 위의 포뇨>의 음악은 바그너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파도를 타고 포뇨가 소스케를 찾아 육지로 달려올 때 들리는 그 웅장한 음악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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