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는 매력적이다. 진시황과 알렉산더 등 수많은 영웅호걸이 염원하던 불사의 존재이며, 인간보다 월등하게 빠르고 힘이 세다. 타인을 조종할 수도 있고, 간혹은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도 있다. 피를 빤다는 행위 자체도 그리 혐오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피를 빠는 행위는 곧 생명의 근원을 마시는 것이고, 타인에 대한 정복과 지배의 의미를 지닌다. 연인이나 의형제를 맺는 이들이 서로의 피를 먹거나 합치는 행위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뻗어나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 뱀파이어 전설이 전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뱀파이어 전설은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 모라비아 등 동구권에 많았고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멕시코와 로키산맥의 인디언들에게도 전해진다. 외계에서 온 뱀파이어가 나오는 토브 후퍼의 <뱀파이어>나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이 뱀파이어의 소굴로 쓰이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등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뱀파이어 전설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작품은 브람 스토커의 고딕소설 <드라큘라>였다. 드라큘라는 비이성과 광기의 존재다. 근대성의 상징인 이성과 합리주의가 당연히 타도해야 할 전근대적 광기의 표상인 것이다. 그래서 반헬싱을 비롯한 이들이 드라큘라의 이름을, 그의 정체를 알게 되자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성적으로 드라큘라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그는 근대문명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주의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물리친 드라큘라 이후 더욱 많은 뱀파이어들이 명멸해왔다. 인간이 두려워했던 초자연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또 다른 얼굴로서 부활했던 것이다.
광기와 탐닉, 염세주의를 상징했던 그들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했던, 해머프로덕션이 만든 70년대 뱀파이어영화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목에 송곳니를 찔러 넣고 피를 빨아 마시는 행위를 성적인 코드로 읽어낸다. 인간의 정기를 빨아들여 끊임없이 젊어지는 불사의 존재는 더없이 강하고 매력적인 존재다. 반면 앤디 워홀이 제작한 <블러드 포 드라큘라>에서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뱀파이어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1976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가 시작된다. <뱀파이어 레스타트> <저주받은 여왕> <육체의 도둑> <악마 멤노크> 등으로 이어지는 뱀파이어 연대기는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4년에 제작된 닐 조던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뱀파이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지성적이다. 그들은 피를 갈구하는 야수가 아니라 사랑과 이별 등 인간의 희로애락과 함께 영생으로 인한 권태에도 괴로워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강인하고, 시간의 몰락을 견뎌내고, 자신의 행동에 한치의 후회도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인간’.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미국사회에서 뱀파이어 연대기의 팬은 <스타트렉>의 팬과 반대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성과 합리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 동부를 대표하는 것이 <스타트렉>의 팬이라면 뱀파이어 연대기의 팬들은 광기와 디오니소스, 탐닉과 염세주의, 서부를 상징했다. 한편으로 뱀파이어 열풍은 68혁명이 사그라든 뒤의 세계를 견뎌내야만 했던 젊은이들이 택한 하나의 도피처였다.
조스 웨던이 창조한 TV드라마 <버피와 뱀파이어>(1997)는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청춘물이다. 뱀파이어를 사냥하는‘슬레이어’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버피의 활약이 중심에 놓이면서,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관통하며 버피와 친구들이 어떻게 세상을 받아들이고 또 싸워나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드라큘라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뱀파이어부터 펑크족 뱀파이어 등 다양한 성향의 뱀파이어가 등장하고, 버피가 사랑하는 뱀파이어 엔젤은 한때 가장 포악한 뱀파이어였지만 저주를 받아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것으로 나온다. 뱀파이어면서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존재는 <블레이드>나 일본 애니메니션 <뱀파이어 헌터 D>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서도 익숙한 존재다. 하지만 그들이 뱀파이어 내의 이질적인 존재로서 반역을 한 것에 비해 엔젤은 단지 ‘양심’ 때문에 사냥꾼이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엔젤은 뱀파이어면서 인간인, 두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뱀파이어가 외부의 침입자로 그려지던 과거에 비해 최근에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다른 존재로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본성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쓰고 연출한 오시이 마모루는 뱀파이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진화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등등. 역사의 과정을 돌이켜볼 때, 오시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선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생명체를 살육하는 야수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구체적인 형상으로 말한다면 야수의 이빨이 번득거리는 반인반수일 것이다.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처럼.
끝없이 변태하는 캐릭터로 불멸할 것
뱀파이어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형상만이 아니라 내면 역시 인간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올해 미국 <HBO> 채널에서 방영을 시작한 <트루 블러드>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세상을 그린다. 인간과 뱀파이어가 불화하는 주된 이유는,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 블러드>에서는 일본에서 개발된 ‘트루 블러드’라는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뱀파이어가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과 뱀파이어가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 공존하게 된다. <트루 블러드>는 셜레인 해리스의 소설 <어두워지면 일어나라>로 시작되는 ‘남부 뱀파이어’ 시리즈를 각색한 것이다. 루이지애나를 배경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성 수키와 뱀파이어인 빌의 사랑을 흥겹게 그린 소설이지만 <트루 블러드>는 수키와 빌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순을 진지하게 파헤친다. <아메리칸 뷰티>와 드라마 <식스 핏 언더>를 제작했던 앨런 볼은 경쾌한 원작을 좀더 심각하고 무거운 드라마로 변화시켰다. 지금도 흑백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의 시골이라면, 뱀파이어가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트루 블러드> 속 뱀파이어는 동성애자나 소수민족 등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와 다를 바 없이 그려진다.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뱀파이어에게 테러와 린치를 가한다. <트루 블러드>에서는 뱀파이어의 행동과 선택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트루 블러드>는 뱀파이어를 인간보다 강하지만 동일한 내면을 가진 존재로서 바라본다. 하지만 <트루 블러드>가 획기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뱀파이어는 초월적인 존재이거나 인간과 동등한 존재, 어느 하나로만 머무를 수 없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화한 뱀파이어는 수없이 변태하면서 천변만화하는 캐릭터로 불멸할 것이다. 우리와 가장 닮았으면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