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 오타와, 자그레브, 히로시마 4대 애니메이션 국제영화제 수상작들만 모아서 열리는 독특한 영화제. 2회를 맞은 애니충격전에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폴란드 출신의 애니메이션 감독 이자벨라 플루신스카는 찰흙을 소재로 독특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조물조물, 찰흙을 빚어 그는 노부부의 권태를 표현하며(<잼세션>(Jam Session)), 아침식사를 하는 부부의 단조로움에 해프닝을 더한다(<아침식사>(Breakfast)). 마치 쌍둥이처럼 노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그림자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쌍둥이>(Twin))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은 갑자기 깔린 안개로 허둥댄다(<마라톤>(Marathon)). 평범한 일상을 빚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유리판 위에 찰흙을 하나하나 빚어 만드는 데 9개월, 약 5만장의 사진과 실재하는 사운드 효과음을 활용한 <잼세션>은 200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으며, <아침식사>는 2006년 히로시마국제영화제 렌조 기타노상을 수상했다. 11월19~20일, 이틀간 계원디자인예술대학에서 애니충격전이 함께 개최한 ’계원애니충격전’의 워크숍 뒤 그녀를 만났다.
-오늘 워크숍에서는 학생들과 찰흙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었다. 6시간 동안의 긴 수업이었는데 힘들지 않나. =환상적이었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기법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또 그들이 그걸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니 좋았다. 찰흙기법이 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은 거 같다.
-찰흙애니메이션은 보통 입체효과를 주기 위해 활용하는데 당신은 그것과 달리 평면에 입체감을 준 부조 작업을 주로 한다. =원래 그림공부를 시작하다 입체감을 주려고 조형을 공부했다. 그런데 그것도 자유로운 표현을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전공을 바꾸고 영화까지 만들게 됐다. 미술학교와 영화학교를 동시에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흥미로웠다. 미술을 통해 영화를 만들고 예술대학에서 영화를 할 원동력을 얻은 셈이다. 물론 목적은 영화였다.
-찰흙을 소재로 삼은 계기는 무엇인가. =첫 작품을 우연히 찰흙을 활용하게 됐다. 유리판에다가 찰흙을 물감처럼 사용해 그림 그리듯이 했다. 평면적인 그림과 달리 2D처럼 입체감이 생기는데 그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미술을 하다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를 한 것처럼 앞으로도 작품을 하면서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찰흙을 사용하지만 내 기법은 계속 변할 것이다.
-특정 스토리를 만든다기보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인간들의 감정을 끌어낸다. 탁월한 관찰력이다. =내 작품들은 연극에 가깝다. <잼세션>은 실제 연극이 원작이다. 중요한 건 이미지뿐 아니라 깊이있는 이야기다. 작품 내용 자체가 직설적이지 않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크다. 그러나 똑같은 이야기에도 제각각 반응하는 관객의 모습이 흥미롭고 놀랍다.
-권태에 빠진 노부부가 마음을 열거나, 무심하던 부부가 해프닝을 통해 화해하는 모습에서 소통의 조짐을 읽게 된다. =잘 몰랐는데 8편을 만들고 나서 보니 내 애니메이션에 유독 신문, 세숫대야, 거울이 많이 나오더라. 아무래도 사람들의 외로움을 포착하다보니 무의식중에 이런 소품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 같다. 지인들이 작품 나올 때마다 ‘이번에도 또 신문이 있네’라고 지적해줄 정도다.
-애니메이션의 표현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뭔가 대단한 테크닉을 사용한다기보다 캐릭터에게 감지되는 사소한 동작들에 집중한다. 그런 작은 부분들이 모여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수도꼭지 돌릴 때, 거울을 볼 때 캐릭터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게 하려 애쓴다.
-컴퓨터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무한 발전 중이다. 느린 작업에 대한 초조함은 없나. =나는 오히려 컴퓨터로 하면 더 느릴 것 같다. (웃음) 내 최대 단점이 아이디어가 너무 많다는 건데, 그럴 때마다 손으로 바로바로 만드는 찰흙은 아이디어를 가장 빠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찰흙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고, 캐릭터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내 작업의 원천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클레이 트레이스’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제작에도 참여하는데 재정적인 고충도 많겠다. =괜찮다. 내 생활도 평범하게 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클레이 트레이스’에서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도 제작한다. 다음 작품은 토끼를 찾아 나선 모험을 그린 <이스터헤지>(Esterhazy)다. 20명의 제작팀이 함께 일하니 월급을 주는 게 내 숙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