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되는 일이 있다. 다시 읽어보니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놀랄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른 책이라 놀랄 때도 있다. 후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대학 2학년 때, 전공필수과목 독해 시험범위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앞 1/3이었다. 초등학생 때 읽은 게 다인데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필기의 여왕인 친구의 책을 빌려다 복사를 해서 첫장부터 해석해가며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때 그 책의 주제는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이게 웬걸. 어린왕자가 우울한 날 작은 별에서 의자 위치를 옮겨가며 몇번이고 몇번이고 해지는 모습을 봤다는 대목에서 빠져들기 시작해 필기된 부분까지 다 읽었는데 시험이고 나발이고 <어린왕자>를 당장 끝까지 읽지 않고는 도저히 못살겠다는 생각이 날 좀먹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학교 구내서점에 가 <어린왕자> 번역본을 사서 마저 읽었다. 어린왕자가 떠나는(절대 죽는 거 아니다!) 순간이 오자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울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요술공주 밍키가 고향 별로 돌아간 이후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결국 시험 시간이 될 때까지 공부는 안 하고 계속 <어린왕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 시험에서 해석만 100점을 받고 문법은 절반쯤 비워서 냈던 것 같다.
<보바리 부인>도 그랬다. 대학 때 플로베르 전공한 교수님 수업이 상상을 초월하게 졸렸기 때문에 남은 평생 <보바리 부인>을 다시 펼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눈에서 힘 빼고 10년 뒤 다시 읽으니 너무 몰두해 입이 돌아갈 지경으로 재밌는 거다. 보바리라는 여자가 과거의 인물이 아닌 현재의 누군가로 얼마든 대입이 가능한 입체적인 캐릭터인데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플로베르의 이성적 판단력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보바리 부인의 심리를 드러내는 교차 편집은 가장 능란한 할리우드 스릴러영화 뺨치고, 그녀의 최후는 두말할 것 없이 허영의 불꽃에 희생되는 현대인의 최후를 상상하게 만든다. 20년 전 영화고 책이고 다 지루하다고 결론지었던 E. 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은 다시 읽으니 그 찬란한 젊은 날에 대해(사실 내 젊은 날엔 IMF가 버티고 있었는데도) 고통스러울 정도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게 연애담이면 내가 황신혜다”며 분노했던 <오만과 편견>은 어떤가. 5년쯤 전부터 해마다 2번씩은 읽는데, 매번 새로 발견하는 대목이 생겨 즐겁다. <빨강머리 앤>을 다시 보니 어렸을 때 왜 길버트를 싫어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앤은 눈이 삐었나? 머리라도 한대 쥐어박고 싶다. “이 멍청아, 길버트가 남자주인공인 거 넌 모르겠냐?”고.
다시 읽으면서 새로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이나 영화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게 직장에도 해당되는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책은 처음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회사나 인간관계는 그렇지 않다. 처음 <씨네21>이라는 직장 문을 두드렸던 8년 전과 지금, 나도 <씨네21>도 달라졌다. 그래서 어떻냐고? <죄와 벌>을 다시 읽는 기분이 이럴까? … 농담이다, 농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던 <캔디캔디>라면 또 몰라도. 하. 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