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새 학기 첫날인 3월2일, 신광여고 미술교사 송기복씨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그곳에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송씨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송씨의 지옥문은 그때부터 열렸다. 송씨는 이로부터 116일 뒤까지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 그리고 성적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안기부는 9월10일 송기복씨가 포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한 간첩단 29명이 아내 한경희와 딸 송기복, 아들 송기홍, 송기수씨 등 모두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송창섭을 제외한 이들 28명은 지난해 10월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날조된 간첩조작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버텨야 했다.
이 사건으로 송씨 집안은 한마디로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서로의 혐의를 입증하는 거짓증언을 해야 했기에 형기를 마친 뒤에도 선뜻 서로 연락을 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당연히도 피해는 각자의 가족들에게도 전가됐다. 특히 송기복씨의 남편이던 송영섭씨는 사건 당시 공군 중령이었는데 이 일로 바로 예편됐고 한달간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를 조종하기도 했던 송영섭씨는 아내를 원망하기는커녕 아내가 구금됐던 1년 동안 단 하루를 빼놓고 매일같이 면회를 갔고,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씨 부부는 숨통을 죄는 억압을 눈물겨운 사랑으로 극복해나갔던 것이다.
추천인은 누구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민간위원 역임. 저서 <대한민국사>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등.
추천한 이유는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송씨 일가 사건은 한마디로 비극이었다. 송씨 가족사를 다루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고문, 상처와 대비되는 송씨 부부의 순애보를 다뤄도 좋을 법하다. 두분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다. 안기부에서는 송기복씨가 엘리트 장교라는 이유 때문에 송영섭씨에게 접근했다지만, 사실 두분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한국전쟁 때 헤어진 두분은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송영섭씨는 송기복씨 때문에 군복을 벗었지만 원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외려 고문 후유증 때문에 정신병까지 얻은 송기복씨를 정성으로 보살폈고, 척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 스스로 척추교정법을 배웠다. 송씨가 아내의 누명이 벗겨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2002년 사망한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화로 만든다면
가슴 절절한 순애보는 고문의 어두운 세계와 대비될 때 환하게 빛날 수 있을지 모른다. 때문에 송씨 부부 외에 안기부의 고문기술자 한명을 등장시키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투철한 반공정신보다는 직업정신에 입각해 매일같이 송씨를 괴롭히는데, 송씨의 증언처럼 최악의 고문은 스스로 옷을 벗은 채 송씨를 혁대로 때리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송씨가 풀려난 뒤의 어느 날, 기술자는 우연히 송씨를 마주치곤 뒤를 쫓는다. 그는 마침내 송씨 부부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날 이후 기술자는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어떻게 대할까. 날선 블랙코미디 요소와 감성적인 순애보를 동시에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임상수 감독이다. 고문기술자 역할로 백윤식이 출연한다면 금상첨화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