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길지 않은 박헌영(1900~55)의 인생은 정말이지 파란만장했다. 그는 경성고보를 졸업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22년 공산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두 차례의 체포 뒤 28년 또다시 러시아로 탈출한다. 32년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출소한 뒤 남한에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8·15 해방 이후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장악했고,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정권에 가담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 등에 의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아 55년 처형당했다.
극적이었던 것은 ‘공식’ 활동만이 아니다. 첫 아내 주세죽이 그가 죽은 줄 알고 동지였던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비비안나와 남한에서 만난 다른 부인과 얻은 아들 원경스님이 부모와 떨어진 채 비극적 삶을 살아갔다는 점, 그리고 일제 경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광인 행세를 했다는 주장과 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이 러시아로의 탈출을 소재로 삼았다는 주장까지, 박헌영이 남긴 궤적은 다채롭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가 진짜 미국의 간첩으로서 동료들을 밀고했는지, 그의 혁명노선이 과연 오류투성이였는지 등의 의문은 분단이라는 상황에 가로막혀 명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 하나는 그가 혼탁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추천인은 누구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정 박헌영 전집> 참여간행 과정에 참여·<이정 박헌영 일대기>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등 저술
추천한 이유는
“박헌영의 삶은 스펙터클하다. 중국, 연해주, 모스크바,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던 그의 자취에는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주한다거나 쫓고 쫓기는 비밀공작 등 긴박감을 자아내는 요소가 많다. 여성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게다가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 전체를 담을 수는 없으리라 본다. 송기원 선생님께서 박헌영과 아들 원경스님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지만 영화로 만들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의 레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점을 많이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에서 그의 삶은 조명할 가치가 있다.”
영화로 만든다면
24부작 드라마로도 그의 삶은 담아내기 어려울 것. 결국 영화에서 그의 드라마틱한 나날을 그리기 위해서는 우회로를 택해야 한다. 그 발단은 90년 10월 비비안나와 원경스님이 가진 첫 해후다. 두 이복남매가 그동안 들어왔던 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는 방식이라면 영화 속에 그의 인생을 응축시키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28년 배를 타고 러시아로 탈출하던 암울한 심경과 동지와 결혼한 아내에 관해 알게 된 쓸쓸한 마음 또한 담길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평생을 ‘빨치산의 아들’이라는 그늘 아래 살아온 임권택 감독이라면 거대한 역사라는 원경(遠景)과 그 속의 인간이라는 근경(近景)을 조화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표범과 같이 단단하고 민첩”하면서도 “쏘는 듯한 안광과 단단한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확고하고 꾸밈이 없는 듯했”(박갑동, <박헌영>)던 박헌영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면 최민식 말곤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