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1865~1945)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전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존재다. 16살 때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개화 사상에 젖은 그는 그곳에서 익힌 영어 실력으로 1883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 장군의 통역관이 된다.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이었던 그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움직임을 눈앞에서 접하며 국제정치에 눈을 떴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로 지목된 그는 이듬해 피신차 상하이로 건너가 다시 유학생활을 한다. 이어 1888년에는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동서양의 근대문물을 익혔던 그는 갑오개혁이 일어난 뒤인 1895년 귀국해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자강회를 이끌었고, 1916년에는 YMCA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졌고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감방에서 6년이나 살았던 ‘민족주의자’ 윤치호의 행보는 희한하게도 친일로 수렴하게 된다. 그는 선진적인 일본의 틀 안에서 조선인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1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노골적인 친일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라는 밋밋한 단어만으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최초의 근대인 또는 최초의 세계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다. 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무려 60년 동안 썼던 일기는 그의 일관성있는 생각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그의 일기는 ‘친일의 내면’이라 부를 만하다.
추천인은 누구
박노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교수·<나를 배반한 역사>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 저술
추천한 이유는
“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 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
영화로 만든다면
윤치호는 어린 날부터 외국생활을 경험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조선화해 친일에 다가갔다. 근대의 휘황찬란한 매혹이 조선을 구습에 젖은 낙후지로 여기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일기의 구체성 때문이다. 그가 갑신정변에 얼마나 비관했는지에서부터 20대 초반 상하이에서 ‘색루’(사창가)와 음주에 몰두했고, 간간이 몽정(夢精)도 했다는 신변잡기성 이야기까지 그의 일기는 담고 있다. 명랑하고 밝았던 한 청년이 일본, 중국, 미국을 거쳐 역사의 중심부에 진입하면서 서서히 변모해가는 모습을 그린다면 흥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라면 윤치호에게서 좀더 드라마틱한 순간을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윤치호의 청년, 중년, 노년기를 닮지 않은 세 배우가 연기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를테면 유아인, 설경구, 이순재…. 너무 안 닮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