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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버라이어티] 더 독하게, 콤플렉스까지 벗겨라
강병진 2008-11-25

지금 버라이어티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나

“단순히 돈 벌어 먹고살자는 방송이 아니에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지난 2007년 10월24일 방영된 <무한걸스>에서 당시 첫 출연한 정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정시아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통해 거듭나려는 배우들에게 하나의 방법론이 됐다. 아침드라마 <진주귀걸이>로 데뷔해 시트콤 <두근두근 체인지>를 거쳐 섹시화보집을 냈던 그녀는 어느 날 사라졌다. <무한걸스>를 통해 그녀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2년 전 소속사의 매니저가 계약금을 포함한 2억원의 돈을 가지고 잠적했었고”그 뒤 “우울증으로 TV와 인터넷에만 갇혀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연기를 한다. 정시아는 지난 3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독한 마음도 있었죠.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더이상 어떤 기대도 없을 것 같았어요.” TV영화 <색다른 동거>를 거쳐 케이블 드라마 <여사부일체>까지 온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과연 그녀가 원했던 이상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고, 살아남았다.

지금 TV에는 정시아의 방법론을 따르는(혹은 엿보기라도 했을) 연예인들로 가득하다. 이유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대중과 첫 대면을 하려 하거나, 이미지를 변신하고 싶거나, 혹은 잊혀진 자신을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키고 싶거나. 그런데 목적이 어떻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유일한 방법인 듯 여겨지는 건 특이한 일이다. 도대체 버라이어티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리고 연예인들은 왜 버라이어티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걸까.

왕자·공주는 사라졌다

지금 버라이어티의 변화를 읽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배우’다. <무한걸스>의 정시아를 시작으로 <패밀리가 떴다>의 김수로와 이천희, 박예진, 그리고 <골드미스가 간다>의 예지원, 진재영, 양정아 등 최근의 버라이어티는 배우를 고정멤버로 삼고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도 신애가 1등 신붓감으로 등극하지 않았던가. 물론 배우들의 브라운관 나들이가, 그것도 오락프로그램 출연이 생경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양상은 여느 때와 다르다.

<패밀리가 떴다>

<무한걸스>

<패밀리가 떴다>의 이천희를 보자. 그는 방송 초기에만 해도 잠자리 선정게임에서 이효리와 박예진이 껴안아주던 1위였다. 그런데 지금은 유재석, 윤종신과 함께 5, 6위를 다툰다. 몇 개월 사이에 벌어진 이 간극은 지난 몇년간 배우를 대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과거 버라이어티 속의 배우들은 왕자 혹은 공주였다. 멋진 슈트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왕림하셨고, 그들의 왕림에 버라이어티의 감초들은 기꺼이 망가지며 그들을 돋보이게 했다. <천생연분>의 윤정수와 신정환, <여걸식스>의 김종민과 이정은 그들을 위한 일곱 난쟁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여걸식스>의 초기방송에서 MC인 지석진이 읊어대던 장광설에 가까운 소개 멘트는 어땠던가. “2005년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눈과 귀를 마비시켜버린 꽃미남 바이러스 살포죄! 매력 만점~~! 느끼 빵점~~! 열정 만만점~~!! 나태 빵빵점!!! 반짝 스타는 싫다!!! 성공을 향한 쾌속 질주보다는 연기를 향한 불 뿜는 열정으로 서서히 충무로를 잠식해가는 바로 저 남자!!! 대한민국 영화계에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 진검을 휘두르며 관객 앞에 나타난 영화계의 일지매! 공유씨 아름다운 만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여걸식스> 18회에 출연한 공유에게)

그처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배우는 가수나 개그맨, 혹은 얼굴을 알리려는 신인 연예인과는 다른 존재였다. 남자배우의 등장에 여자출연자들의 표정이 환해지고 남자 게스트들이 일부러 찝찝해하는 식의 클리셰도 그때 등장했다. 하지만 배우와 다른 부류의 연예인 사이에 놓인 경계가 사라진 지금, 배우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시스템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할 일도 많아졌다. 이제 배우들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서 약간의 춤과 노래로 촬영시간을 때우던 시대는 사라졌다. 배우들에게 눈빛연기를 주문하지도 않고, 옆자리에 앉은 이성출연자에게 가상의 프러포즈를 해보라는 이야기도 없다. 과거 MBC <천생연분>에 출연했던 이서진은 ‘보조개 미남’이란 수식어와 약간의 춤사위만으로 커플 결성에 성공했고(사실상 제작진이 시켰고), 단 2회 출연으로 프로그램을 떠났다(사실상 다녀갔다). KBS <MC 대격돌-위험한 초대>에 출연했던 김태희는 진행자들의 질문에 답하면 그만이었고, 그 답변에 섞인 단어 때문에 옆자리에 앉은 MC들은 물벼락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 버라이어티 속 배우들은 제 한몸을 던져 대박웃음을 건져낸다. 운동 못한다고 구박받고, 힘없다고 찌그러지고, 콧소리낸다고 지적받고, 자다 일어나 부은 얼굴 때문에 놀림당한다. 5년 전 <서세원의 토크박스>였다면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핀잔 정도를 받았을 테고, 2년 전 <X맨>이었다면 개인기가 어설프다는 정도의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리얼리티가 모든 걸 다 바꿔

배우들을 대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태도가 변했다는 건 곧 버라이어티의 형식과 위상의 변화를 뜻한다. 무엇보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탄생이 가져온 변화는 막강했다. 지금은 모든 버라이어티가 ‘리얼’을 표방한다. <놀러와> <야심만만-예능선수촌> <해피투게더> <상상플러스> <무릎팍도사> <라디오스타> <명랑히어로>는 리얼한 토크쇼고, <1박2일>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 <골드미스가 간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리얼한 상황극이며, <스타골든벨>과 <세바퀴>는 리얼한 퀴즈쇼일 것이다.

‘리얼’의 태동으로 (톱스타가 아닌) 연예인들에게 ‘신비주의’란 과거의 산물이 됐다. 시작은 연애담이었다. <야심만만> 1시즌의 프로그램을 다시 떠올려보라. 매주 방송마다 출연진이 털어놓은 연애사들은 바로 다음날 온라인 기사의 먹잇감이 됐다. 고백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현영은 <여걸식스>를 통해 1976년 용띠인 자신의 나이를 공개했고, 나아가 ‘쌩얼’도 드러냈다. 지금은 ‘쌩얼’이나 ‘원래 나이’쯤은 궁금하지도 않은 사안이다. <패밀리가 떴다>는 매주 이효리와 박예진의 쌩얼이다 못해 부은 얼굴을 내보내고, 리얼 버라이어티로는 가장 신상인 <골드미스가 간다>는 첫 방송부터 출연진들의 주민등록증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제는 눈길을 끌지 않는 ‘리얼’이다.

<골드미스가 간다>

<우리 결혼했어요>

지금 시청자에게나 제작진에게나 가장 각광받는 리얼 아이템은 ‘콤플렉스’다. 이 방면으로 큰 재미를 본 건 <무한도전>일 것이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남자’들이란 컨셉으로 뚱뚱하고, 못 웃기고, 키 작고, 머리없고, 노총각인 콤플렉스들을 드러내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 최근 들어 <무한도전>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이제 시청자가 그들의 콤플렉스를 콤플렉스가 아닌 개성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유재석과 박명수의 결혼(그것도 아나운서와 피부과 의사랑!)으로 그들이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남자들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스타들의 콤플렉스는 끊임없이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노출되는 중이다. <체인지>의 첫 타자로 출연한 이효리는 지하철의 어느 승객에게 “옛날에는 남자들이 다 죽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나이도 서른이라 많은 것 같다. 이를 극복하려면 오랫동안 안 나오면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카이스트>의 서인영은 한양대 교수와의 면접에서 영어문제를 풀지 못하자 “2년제도 있고, 사이버대학도 있으니 4년제만 고집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카메라를 껐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신애는 “CF가 아닌 방송으로 나를 본 사람들이 뚱뚱하다고 해서 몸매에 콤플렉스가 많았다”고 털어놨고, 황보는 연하의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나이 많은 신부의 애환을 드러낸다.

빨랫감까지 팔아야만 소비자 눈길잡는 시대

<패밀리가 떴다>에서는 유재석, 윤종신, 김수로가 장년층으로 분류되어 젊은 출연진들에게 면박을 당한다. 그런가 하면 <골드미스가 간다>는 아예 미혼인 여성출연진들을,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를 들어 콤플렉스 덩어리로 규정해놓은 프로그램이다. ‘진짜 리얼이란 무엇이냐’를 놓고 벌어진 경쟁구도에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갈수록 독한 ‘리얼’을 찾았고, 급기야 그 한계점이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데까지 온 것이다.

물론 이들의 콤플렉스는 방송시스템 안에서 치유되거나 웃음이 된다. 이효리의 눈물은 곧 그녀에 대한 격려로 이어졌다. 서인영은 ‘그럼에도’ 신상을 부르짖는 당당한 모습으로 호감을 샀다. 신애의 아픔은 알렉스가 치유했고, 황보는 요즘 김현중에게 사랑받는다. 그러나 콤플렉스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까지 공개해야만 자신을 팔 수 있다는 지금의 스타 소비시스템이 가진 단면을 보여준다. <패밀리가 떴다>를 연출하는 장혁재 PD는 “다른 버라이어티 형식보다도 리얼리티로 대박이 날 경우, 시청자에게 소구되는 강도가 훨씬 큰 것 같다”고 말한다. “예전에 했던 <X맨>도 버라이어티의 모든 형식을 구겨넣은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는 그때도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을 대단하다고 봤다. 하지만 그것도 한 꺼풀 씌워놓은 상태였다. 지금은 아예 노메이크업 상태로 옷도 잘 안 입고 실수하는 걸 보여주는데, 시청자에게 각인되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아야 ‘티’가 나는 지금으로서는 컴백과 함께 <오프 더 레코드>에 출연한 이효리처럼 방구석에 늘어진 빨랫감까지 팔아야만 소비자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상황이다.

모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팔고자 나서고 있다는 것과 갈수록 독하고 새로운 ‘리얼’을 찾고 있는 버라이어티의 입장은 묘한 상생의 구도를 만든다. <패밀리가 떴다>의 장혁재 PD는 “인적구성의 차별화를 위해 배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배우들이 출연하지는 않지만, <1박2일>이 김C와 이승기를 고정멤버로 끌어온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1박2일>의 이우정 작가는 “버라이어티 안에서 자주 본 사람이 아니라 신선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시아가 출연한 <무한걸스>를 기획한 한백교 PD의 말도 다르지 않다. “기존의 인력풀과는 다른 곳에서 찾으려 했다.” 이 말은 곧 더이상 시청자가 신정환이나 박명수나 노홍철이나 지상렬이나 강호동이나 유재석 같은 버라이어티 단골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부 연예인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유아기를 버틴 리얼 버라이어티로서는 블루 오션을 찾고 있었고, ‘배우’는 그 시작일 뿐인 것이다.

<패밀리가 떴다>

<카이스트>

하지만 버라이어티와 연예인이 짜놓은 상생의 구도에는 하나의 경계선이 있다. 버라이어티의 스타들이 ‘스타’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팔기 위해서는 결국 스타의 위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데려온 제작진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다. 스타들의 리얼한 모습을 끌어내 시청자의 반응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스타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서는 안된다. 다시 배우를 예로 들어보자. <패밀리가 떴다>의 이천희가 ‘엉성’한 짓을 할 때마다 자주 떠오르는 자막은 “천희야, 너 이래서 드라마 하겠니?”다. <무한걸스>의 정시아가 대머리 가발을 쓰고 수염을 그리면서 ‘앵앵’거렸던 말은 “나 드라마 해야 하는데…”였다. 아무리 큰 웃음을 노린다 해도 배우는 배우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배우와 제작진 양쪽의 딜레마인 것이다. 장혁재 PD는 “멤버들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게 웃음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본적인 원칙은 이들이 아무리 얄미운 짓을 해도 얄밉게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멤버들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재미있는 장면이어도 배우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거나 부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장면은 편집해버린다.”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의 버라이어티만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의 버라이어티와 달리 한국의 버라이어티는 스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우의 수를 다 찾을 때까지 쇼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과연 버라이어티의 블랙홀적인 흡입력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것은 현재 예능계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인 ‘리얼’의 수명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스타의 24시간뿐만 아니라 그의 콤플렉스까지 수면으로 오른 지금, 언뜻 ‘리얼’의 끝은 여기처럼 보인다. 이제 스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그들의 무엇을 드러낼 수 있을지를 생각할 때, 남아 있는 소재가 많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얼’의 세계가 한없이 넓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우정 작가는 “누가 어떤 틈새를 찾아가느냐에 따라 리얼 버라이어티의 확장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가 하면 장혁재 PD는 아예 “지금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지난 시간 동안 ‘리얼’은 여러 가지 포장으로 다른 얼굴을 만들어냈다. <무한도전>의 여섯 남자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자 <1박2일>이 됐고, 다시 그 여섯 남자에게 2명의 여성을 동행시키자 <패밀리가 떴다>가 됐으며, 그들에게 로맨스를 입혀놓고 해외로 보내자 <꼬꼬관광 싱글싱글>이 됐다.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스타들도 변한다. 8년 전 <스타 서바이벌-동거동락>에서 “루돌프스 사슴코스는 매우스 반짝이는스 코스”라 노래했던 이범수와 5년 전 <강호동의 천생연분>에서 약 20초간의 퍼포먼스로 좌중을 압도했던 비는 이제 <무릎팍도사>에 나와 자신의 인생역정을 털어놓는다. 예능프로그램이 찾는 스타의 범위도 변할지 모른다. 소설가 황석영이 <무릎팍도사>에 나와 방북의 뒷이야기를 할 줄 누가 알았던가. 버라이어티는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서 ‘리얼’을 찾을 것이고, 당사자들은 점점 더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스타, 그리고 스타의 범위의 변화를 놓고 그 경우의 수를 다 찾을 때까지 쇼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연예인들이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더욱 치열하게. 이건 정말 단순히 돈 벌어 먹고살자는 방송이 아니기 때문이다.